카메라가 늘 ‘정직’한 건 아니다. 빛이 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미세한 왜곡이 생겨날 수 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순간, 살짝 당혹감이 일었다. 유선은 TV와 스크린에서 보던 선 굵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약간의 수줍음이 느껴지는, 유난히 얼굴이 작아 보이는 서구형 미인. 의상을 갈아입기 전 캐주얼한 복장의 그녀에게서 <대망>의 중국 무사 캐릭터나 <빤스 벗고 덤벼라>의 색깔있는 여자, 에서 일과 사랑에 당찬 희은은 없었다.
“절 오래 아는 사람은 정 많고 여리다고 해요. 강한 캐릭터를 좋아하진 않는데 한번 그런 인상이 생겨서 그런지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뭔가 전문직에 종사할 것 같은 이미지로 생각들을 하더군요.”
첫 장편영화 데뷔작이라 할 <4인용 식탁>에서 정원(박신양)의 약혼녀 희은은 유선에게 붙어버린 그 이미지의 전형이다. 조명 디자이너인 희은은 정원이 거의 외면하다시피하는 결혼 준비를 혼자 해치우며, 동시에 부담스런 호텔 프로젝트까지 왕성하게 해낸다. 늘 에너지에 넘치는 희은은 무겁게 가라앉은 인물 사이에서 살짝 튀어보일 수밖에 없다.
“스릴러 몫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극중에서 누구 하나 나를 받아주지도 않는데 분위기 쇄신은 혼자 맡아야 하니 조금 힘들었죠. 감독님도 자칫 늘어지는 템포를 당겨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강조하셨고.”
영화에서 희은이 가장 심각했던 순간은 정원을 의심해야 할 때였다. 호텔에서 연(전지현)과 함께 나오는 약혼자를 보고 그는 혼란을 느낀다. 그뒤 혼자 맘을 다지러 여행을 떠나겠다며 정원과 차 속에서 직설화법을 피한 긴 대화를 나눈다. 미묘한 감정선을 잘 살려야 하는 대목이었다. 어렵지 않았을까?
“아뇨, 가장 수월했어요. 이미 희은이 어떤 인물이란 게 다 보여진 상황이고, 감정도 충분히 무르익은 뒤였으니. 근데 실제의 저라면 희은처럼 통 크고 여유있게 행동하지는 못할 거예요. 성격이 급한데다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기 때문에 ‘그 여자 누구야’ 하고 바로 따지고 나섰을 거예요.”
성격이 급한 건 사실인 듯하다. 연극원을 7년 만에 졸업한 건 일종의 조바심 때문이었다. 외부 활동이 어려운 학사 일정 때문에 휴학을 하면서까지 오디션도 보고 그랬다. “바깥 세상에 빨리 나가보고 싶었고, 빨리 꿈을 펼치고 싶었어요. 때가 아니어선지 좌절도 했지만요.”
꿈도 아주 일찍 정해버렸다. 초등학교 때 토요일마다 열렸던 학예회에서 콩트 같은 걸 만들어 발표하면서 재미가 붙어버렸다. 칭찬과 박수에 느끼던 희열은 중고등학교 시절로 이어졌고,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첫 장편 데뷔작이라 할 에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아요. 어떤 배우가 나왔는데 인사하는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 인사의 느낌이 남아 있는 배우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유선이 모처럼 ‘연약한’ 여인으로 돌아간다. SBS 새 주말드라마 <태양의 남쪽>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최민수의 가슴에 깊은 슬픔을 묻게 하는 연인으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