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바람난 가족> <4인용 식탁>의 여성들,몸을 이용해 제도를 돌파하다
2003-08-21
글 : 심영섭 (평론가)

남근 중심에서 자궁 중심으로 옮아가는 한국영화

1. 프롤로그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람난 가족>은 바람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다. 페미니즘, 일부일처제, 불륜과 간통의 질곡에 기대어, <눈물>보다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가깝게, 임상수는 처음으로 성이 아닌 죽음과 죄의식, 몸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주인공 호정은 춤을 전공했다는 설정에서도 드러나듯이 몸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여자이다. <바람난 가족>의 주인공 모두는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마다 손을 베이고 몸을 다치고 피를 토한다. 마사지를 하고, 요가를 하며, 춤을 추고 등산을 하는 주인공들. 몸을 위해 살고, 몸이 마음을 배신하고, 몸이 늙으면 죽어버리는 유물론적인 진실을 포획하며, <바람난 가족>은 호정이 초음파로 새로운 생의 근원인 자신의 자궁을 마주 대하는 것으로 끝난다. 텅 빈 체육관은 마치 호정의 텅 빈 자궁같이 외로워 보이지만, 그녀는 또 다른 정자 제공자였던 남편을 걸레질 한번으로 아웃시킨다. <바람난 가족>이 의도하는 그리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누가 보아도 급진적이다. 가족의 해체는 전적으로 호정과 시어머니 두 안주인의 손에 달려 있고, 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을 막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역사상 새로운 <안토니아스 라인>의 탄생으로 보이는 호정의 욕망, 자신의 유전자만으로 이루어진 친자 가계를 형성하려 드는 호정의 선택은 과연 온전히 그녀의 욕망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성감독인 이수연은 으로 극단의 답을 한다. (공포영화로서는 거의 낙제점에 가깝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전복적인 모성 이데올로기를 들이밀며, 영화는 ‘접시를 깨자’의 표어를 지나 ‘밥상을 깨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바람난 가족>이나 <싱글즈>가 보여주는 미혼모 신드롬은 남성감독들이 의도적으로 주장하는 캐치프레이즈에 가깝게 느껴진다. 반면 아이 셋과 투신자살한 이 땅의 여성과 동일한 공포를 체현하는 은 훨씬 더 지상의 기운을 가깝게 받고 있는 듯 보인다. 의 등장은 <자유 부인> 이래 유구했던 대한민국 여성들의 욕망이 자궁을 채우는 것에서 비워내는 것으로, 외간남자와의 연애를 통한 부계적 혈연의 교란이 아닌 ‘거부’로 변해버렸다는 점을 분명히 증거한다. 아이는 추락사하고, <소름>과 달리 어머니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여자는 남편에게 구타 대신 보호를 받는다. 이렇듯 변화하는 모성 이데올로기 앞에서, 변화하는 남과 여 앞에서, 다시 한번 한국영화 속 여자들의 자궁을 명상해본다. <여고괴담>에서 <바람난 가족>까지, 존재 자체의 연원을 잃어버린 듯했던 남한 여자들이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궁을 확인하고 바라보기까지,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일까?

2. 사라진 남한 여자들 - 회피된 자궁 시기

한때 이 땅의 영화에서 남한 여성들이 아니 처녀들이 사라져간 시기가 있었다. 아마도 시작은 98년 나온 <여고괴담>부터였을 것이다. <월하의 공동묘지> 이후 산발머리에 피를 뚝뚝 흘리며 나타나던 한국 공포영화 속의 처녀귀신들은 이제 단정한 교복 차림의 소녀가 되어, 한국사회의 억압을 증거하는 전령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2000년 이후 펼쳐질 자궁 공포증에 대한 하나의 증후라는 것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이후 99년과 2000년 대한민국 흥행의 역사를 새로 쓴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두 영화주인공 모두가 이 땅이 아닌 어떤 곳, 북한 여자 혹은 중립국에서 날아들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방희-이명현(김윤진)은 맑은 물에서만 사는 물고기 쉬리인 동시에 히드라로 규정된다. 궁극적으로 <쉬리>의 내러티브와 정서의 핵심에는 여성이라는 특별한 성차의 인간에게 부여되는 사회적-개인적 욕망의 분열, 그 화합되지 않는 정체성의 분열에서 나오는 슬픔이 반전의 함정에 싸여 있었다. 또한 외국인, 황인종 그리고 여성이라는 비주류의 타자를 세겹으로 겹쳐놓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피(이영애)는 판문점의 금을 비집고 들어가 남성 비밀결사의 비극을 파헤치지만 끝내 그 공동체의 언저리를 서성일 뿐이다. 이방희-이명현-소피. 그녀 모두는 강인했지만 차가웠고, 적당히 지적이고 무성적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신은 또 여자들을 만들고 스크린 위의 여성들은 계속 수입되었다. 국가 대표 호구이며 삼류 깡패인 강재에게 파이란은 먼 나라에서 온 구원의 여신이고 백지 같은 영혼의 그녀는 위장결혼한 강재와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한다. 처음 본 남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파이란은 <쉬리>의 여전사와 달리 안온하고 따뜻한 전근대적인 여성이었지만,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여성주인공들처럼 무성적인 여성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사랑을 아는 자 혹은 구원을 아는 자로서 자연을 대표하는 할머니의 열풍, <집으로…>. 흥미로운 것은 여성들이 순결했을 때, 이국에서 몰려들었을 때, 할머니라는 안전한 타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 임신과 낙태, 불륜과 성적 일탈의 이슈는 당시 영화에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애국심에 울고, 사랑에 울고, 생활고에 울고, 손자 때문에 울지만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아야만 임무를 완수하는 이 땅의 처녀들은 아닌 것이다.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남한 여자들, 그 어린 백성들의 사랑스런 자화상이었던 <고양이를 부탁해>가 있긴 했지만, 그녀들은 20살의 약동하는 섹슈얼리티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떡볶이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보이는 소녀 취향의 여성들이었다.

3. 학대받는 자궁들 - 자궁 공포의 시기

그것은 다 커버린 사춘기 딸을 외면하는 아버지의 심리처럼, 가임 가능한 남한 여자들에 관한 철저한 외면이자 회피였다. 국외자라는 옷을 입고 혹은 할머니라는 대리 타자의 몸을 빌려서야 순정한 여주인공이 되어 나타나는 이 이상한 현상 앞에서, 그것이 실제로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순결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데에 대한 대한민국 남성들의 공포이자 침묵이었다는 것은 이후의 영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2002년 판타지영화 속에서 부활한 젊은 여성들의 육체는 그 부활의 대가라 하기엔 너무나 처참한 몰골로 구타당하고 살해당한다. 이 시기의 판타지물, <하얀방>이나 <폰> 혹은 등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집중적으로 유산과 낙태의 문제를 원죄적 공포와 연결짓는다. 유령이 된 혹은 사지절단당한 그녀들의 죄는 분명하다. 그들은 원조교제를 했고, 궁극적으로는 적으로 밝혀진 남자와 동침을 했고 그들의 아이를 가졌다.

이미연 감독이 만든 <버스, 정류장>은 그러한 여주인공에게 깊은 연민과 면죄부를 주었지만 나머지 영화들은 그럴 수 없었다. <하얀방>은 기실 낙태 뒤 텅 비어 있는 자궁, 낙태된 아이들의 영혼이 물러갈 줄 모르는 죄로 물든 자궁에 대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피를 흘림으로써 스스로를 정화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 오히려 핏빛 소파가 되는 자궁이 하얗다는, 이 상징적 거세의 이미지는 여성의 임신과 낙태에 대한 지독한 공포의 현현으로 여성관객을 짓누른다. 역시 월경 주기와 범죄 주기를 일치시키며 범죄심리학에 몰두하더니 불현듯 범인의 동기를 범인의 어머니에서 온 것, 즉 낙태라는 태곳적 원죄에서 건져올린다. 에서 낯선 사내에게 철삿줄로 목졸림을 당했던 미혼모의 내장이 튀어나온 모습, <하얀방>에서 혼전 아이를 가진 상태로 애인에게 구타를 당하는 유실의 모습은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제도 외의 정자를 받아낸 여성들의 자궁이 어떤 운명에 처해지리라 하는 것을 만방에 공포하는 잔혹한 이미지였으리라. 그것은 처벌이었다. 그것은 저잣거리의 효수였고 공포의 정치학이었다. 여성전사로, 지고지순한 구원의 여신으로 수입된 외국 여성들이 남성 판타지의 대상이 될 때, 그녀의 자궁은 온전히 보존된다. 그러나 유산을 하고 낙태를 하면서 혹은 영화 <소름>에서처럼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여성은 철저히 사지절단당하고 자궁은 너덜너덜해진다. 무너져가는 아파트의 이미지가 선명한 <소름>의 텅 빈 자궁에 대한 은유는 그래서 소름끼친다. 그녀들은 슬프고 불온하고 용감하고 지적이고 심지어 엽기적일 수 있지만 아이를 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한몸 고이고이 지켜 서울대 법대 출신의 남자에게 시집가서 ‘가문’이라는 그 남근 중심적 줄줄이 사탕의 가계도를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하는 <가문의 영광>은 가부장제 지킴이 여성의 전형적인 성공담이 아니던가?

<여고괴담> 이전에 여공/식모, 호스티스, 유령 혹은 자유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판타지 영화 속 여성들은 그 강렬한 섹슈얼리티와 신분 상승을 교란할 위험으로 오랫동안 이 사회의 타자/괴물의 모습을 빌려서야 스크린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더이상 나쁜 여자가 나쁜 여자가 되지 못하는 90년대 후반기 들어, 여성 관객의 욕망과 남성감독이 만든 영화들은 끊임없이 불화했다. 지극한 구원의 여신의 자리에서 추락한 대한민국의 처녀들은 다시 판타지의 틀 안에서 울부짖고 징벌받고서야 현실로 귀환하였고, 젊은 관객의 욕망과 조우하지 못한 <고양이를 부탁해>와 <버스, 정류장>은 결국 여성관객에게조차 외면받는다.

4. 반격 - 수컷들의 악몽

그러나 반격은 시작되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주인공 연희(엄정화)는 2002년의 여성들이 욕망하는 결혼과 연애의 병행이라는 판타지를 향해 내달리며, 본격적으로 여성관객의 환대를 받는 최초의 여성이 된다. 낮에는 사랑하는 남자의 옥탑방에서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을 하다 밤에는 적당한 부와 안락함을 주는 법적인 남편과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연희의 줄다리기는 위험하지만 짜릿하게 안락한 구석을 지닌다. 그러나 그녀의 이중성은 결혼제도 자체에 대한 혁신보다는 결혼제도의 땜빵이나 공상 정도의 중혼에서 멈춰진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영화 <밀애>와 함께 2002년 여성관객이 뽑은 최고의 여성영화에 올랐다. 사실 가부장제를 발로 차버리는 대신 중혼의 욕망을 고집하는 연희의 행동은 2002년 대한민국 사회의 무의식에 도사린 자궁 공포증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일종의 악몽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연희가 대학강사인 준영(감우성)과 남편 모두와의 삶을 병행하는 한, 그녀의 자궁에는 두 남자의 정자가 오락가락할 것이다. 생물심리학적으로 많은 여자에게 가급적 자신의 씨를 퍼뜨려야 하는 수컷의 입장에서 그것은 실패이자 수치요, 두려움이자 분노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이 싸가지 없는 여성의 욕망대로라면 가문의 영광이 재현되기는커녕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두 사내의 정자가 한 자궁에서 섞일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자신의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한, 그건 미친 짓을 지나 수컷들의 악몽에 다름 아니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알 수 있지 않은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엿보이는 연희의 욕망이 결국 한국 남성들에게는 지극한 공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2002년 판타지영화에서 명멸하는 자궁 공포증은 이 땅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순결 이데올로기가 파괴되는 자리에 피어난 독버섯이다. 동시에 그것은 심지어 그 흔한 TV드라마에서조차 옥탑방 고양이가 야옹거리는 상황에 직면한 이 땅의 남성들의 불안, 그 불안이 여성들의 자궁에 투사된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처벌이기도 했다.

이후 여친들의 유산과 순결의 문제는 이제 역으로 대한민국 남성주인공들이 보여줄 수 있는 순정의 표상이 되어갔다. 섹스코미디를 표방했던 <색즉시공>에서 차력을 하는 은식(임창정)의 행동을 보라. 그는 심지어 친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낙태를 한 은효(하지원)에게 미역국을 끓여 바치는 순정을 보여준다. 그가 병상의 은효에게 스스로를 때리고 차면서라도 웃음짓게 만드는 장면은 <색즉시공>이 지니고 있는 물리적 마조히즘의 어떤 극한을 보는 것 같다. 여자는 순정을 남자는 순결을 택하며 신파와 멜로와 코미디를 샌드위치시켰던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는 또 어떠한가. <편지>류의 죽어서까지 잘해주는 남자를 지나, <엽기적인 그녀>와 <색즉시공>의 남자들 역시 불가능한 남자들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죽어서 잘해주기보다는 살아서 너그러운 남자, 그 너그러움이 거의 마조히즘에 가까운 남자들은 일련의 판타지영화에서 보여지는 가학적 살인자의 모습과 거의 대극을 이루는 남성 판타지의 두축을 이루어낸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2002년 대한민국에서 변화하는 여성들과 변화하지 않는 남성들의 의사소통에 교집합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담지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해안선>에서 이윽고 군인들의 공동의 씨받이가 된 미영이 그들 남성 공동체의 손에 마취제도 없이 강제로 유산당하는 설정은 김기덕의 자장 안에서뿐 아니라 사회문화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게 보여진다. 누구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공동의 여자에 대한 판타지와 그 결과로 빚어지는 내 것일 수도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는 태아.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해안선>이 어떤 점에서 통한다는 주장은 과연 지나친 추론일까?

5. 에필로그

그러므로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람난 가족>과 <싱글즈>의 호정과 나난이 얼마나 먼 길을 돌아서 왔는지를. 2003년의 히로인들은 더이상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가 꿈꾸는 식의 중혼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바깥, 그 경계를 돌파하면서 씩씩하게 미혼모 발대식을 선포한다. 역시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적어도 이제 2003년 여성주인공들의 자궁은 더이상 피 흘리지 않고, 여성들의 육체의 한 부분이 되어간다. 나는 그 상징을 자신의 자궁 초음파 사진을 찾아 보는 문소리의 눈길에서 찾아본다.

여기에 맞물려져서 더 흥미로운 쪽은 바로 남자주인공들의 태도 변화이다. <바람난 가족>은 남자들이 좀더 쿨할 것을 요구한다. <바람난 가족>의 주인공 영작이 정작 직면한 것은 여자가 아닌 아버지였고, 성이 아닌 죽음이었다. 그가 역사의 과오를 증명하는 한 무더기의 유골을 마주 대한 것처럼, 영작은 가족 해체에 대한 죄의식과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하고서 다른 여자와의 섹스를 통해서 이를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기실 영작은 쿨하려 하지만 결코 쿨하지 못했다. 바람난 아내를 구타하고 또 그 아내에게 내쳐지는 영작은 한국 영화역사에서 성과 가족을 분리하려는 이중적인 몸짓이 궁극적으로 아직은 실패했음을 알려준다.

반면 의 남자주인공 정원은 영작보다 더 적극적으로 친부 살해를 감행하고, 이후 그 귀신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을 물려받았다. 그가 본 죽은 아이는 자신의 죽어버린 어린 시절이자, 이제는 서서히 해체되어가는 대한민국의 가족제도, 그 질긴 밥상머리 앞에서는 아이들의 현현이기도 할 것이다. <바람난 가족>과 모두가 입양과 아이들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 더 놀랍게도 이들 영화들에서 아이들이 모두 추락사한다는 유사 설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자궁이냐 사회냐 가족이냐 하는 한국영화 속 여자주인공들의 선택은 이 사회의 뿌리 자체를 뒤흔드는 어떤 비장하고도 절박한 기운을 휘감고 있다. 분명한 것은 80년대 리얼리즘 세대라고 일컫는 박광수, 장선우 그리고 최근의 이들의 계보를 잇는 이창동의 영화만 해도, 가족은 변화하는 물질주의와 광포한 근대성의 균열을 드러내는 진원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그 다원적인 복합체는 가족에서 여성들의 자궁으로, 체제에서 몸의 문제로 좁혀지고 있다. 그것은 80년대 이전의 영화들이 중심과 주변을, 아버지와 아들을 가르면서 그 가운데 자유부인을 끼워놓았지만, 2000년대 이후는 가정과 사회와 대안가족으로서의 경계를 허무는 정반대의 작업이 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한국영화는 그 서술 구조가 남근 중심에서 자궁 중심으로 옮아가는 과도기로 기록될 듯도 하다. 아마도 유산과 낙태, 출산 같은 자궁으로 해낼 수 있는 그 모든 삶의 비밀과 제의들은 순결과 이혼과 모성 이데올로기와 동성애, 동거 같은 모든 대안적인 가족 양태에 대한 유혹과 혼란의 진원지로서 한국영화 속에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처녀들이 남편을 빼앗아가는 아줌마의 경쟁자가 아닌 아줌마의 동료가 되어 ‘여자들의 저녁식사’를 허할 날은 있을 것인가? 그날까지 우리를, 우리 사회를, 우리 가족을,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반사해내고 있는 자궁은 우리의 거울이다. 공포의 자생지가 아닌 희망의 근거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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