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경의 얼굴엔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영화홍보, 결혼준비, 미뤄왔던 눈 치료까지,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스케줄에 치어 많이 야위었지만, 얼굴에서 환하게 빛이 날 정도로 컨디션은 좋아 보인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지던 신은경에게서 흘러나온 콧소리는, 충격 그 자체다. “여봉! 안 심심하시죵?” 그뿐인가. 사진 촬영을 하는 짬짬이 뭔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듯싶어서 바라보면, 그 시선의 끝엔 여지없이 매니저 겸 새신랑이 있다. “결혼, 안 하셨죠? 하세요. 때가 되면? 저도 그랬는데요, 그 때란 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드는 거더라구요.” 결혼이 종교가 될 수 있다면, 신은경은 지금 열혈 신도다. 진심으로 전도하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이 신은경이, ‘형님’이라 불린 그 신은경, 맞아?
하긴, 사람이, 배우가,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다면, 얼마나 지루하겠나. 게다가 신은경이 ‘의외로’ 여자답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카메라를 쏘아보며 “나는 나”라고 외치던 중성적인 카리스마, 그게 신은경의 전부는 아니다. <종합병원>의 톰보이와 <조폭 마누라>의 깔치 형님 사이에, 신은경은 숱한 작품과 배역들을 거쳤다. 사창가로 흘러든 여인의 일대기를 그린 적도 있었고, 로맨틱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깜빡들 한다. 신은경이 ‘여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 여자거든요. 여자, 맞거든요.” 연기로 여성스러움을 어필하는 게 어려운지를 물으니, 신은경은 섭섭한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영원히 따라붙을지 모르는 그 이미지를 억지로 떼어낼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평생 연기해도 자기 캐릭터나 고유 영역을 못 갖는 배우들이 있는데, 저는 운이 좋은 거죠. 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으니까, 그걸 깼을 때 임팩트도 더 커지잖아요. 부담스럽긴 하지만, 나쁘진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조폭 마누라2: 돌아온 전설>은 전편에 대한, 그리고 신은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시도일 수 있다. 암흑가를 평정한 깔치 형님이 세력 다툼 도중 머리 부상을 입어 기억을 잃어버리고, 중국집 철가방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 다만, 머리가 잊은 걸 몸은 기억하고 있어서, 은행강도를 때려잡고, 상인들의 대변자가 되는 등의 황당한 활약을 하게 된다. “조폭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렸을 때, 은진은 그냥 여자거든요. 자신이 누군지 깨닫고 나선 달라지지만요. 캐릭터 자체가 전편보다 복합적인데다 상황에 따라 계속 달라지기 때문에 연기하는 재미가 더 컸어요.” 2편을 찍으면서 겪은 가장 큰 고충은 실명 위기까지 갔던 눈 부상이 아니라 기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고 한다. 1편의 전국관객 530만명, 그리고 2편의 출연개런티 4억원으로 이어진 부담감 또는 책임감.
전편에 대해선 “애초 기대치가 제로였거나 마이너스였기 때문에” 그 엄청난 흥행이 가능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솔직한 신은경은 본인의 기여도도 낮게 매기지 않는다. “늘 멜로만 하던 참한 배우가 나와서 주먹질하면, 그거 보기 얼마나 안 좋아요. 근데 저처럼 주먹질할 것 같은 배우가 주먹질하니까, 자연스럽다고 보신 거죠. 예뻐 보이려고 안 하니까.” <조폭 마누라>를 두고 제기된 “여자의 탈을 쓴 마초”라는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에 대해 신은경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다”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대신 전도된 성역할에 대한 카타르시스가 그토록 클 수 있었던 배경은 수상하다고 일러준다. “여성 파워가 큰 나라에선 별로 어필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지 못한 여기니까, 그만큼 쇼킹하게 받아들인 거겠죠.”
눈을 다치고 나서도 촬영을 강행한 건 신은경의 뜻이었다. 양쪽 시력 차이가 너무 커서 생활에 적응 못할 만큼 멍한 상태였는데, 그 덕에 기억을 잃어버린 은진의 ‘백치스러움’이 저절로 체현됐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전편보다 업그레이드된 액션을 소화해낸 보람도 크다. 불편한 몸으로도 촬영을 마칠 수 있었던 힘은, 또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는, 늘 곁에서 지켜준 예비신랑과 동생의 존재. “일 자체가 너무 좋아서 한다고는, 말 못해요. 제가 한 걸 보고 가족이 좋아해주면, 그걸 보면서 보람을 느끼는 거죠.” 새로운 가족을 꾸리려는 지금, 신은경은 커리어 사상 가장 커다란 폭의 진화를 기대하고 있다. “배우라고 해서 모든 걸 체험해볼 수는 없잖아요. 나머진 흉내내는 건데, 거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체험이 지금 제게 필요한 거죠. 좋은 의미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을 믿어요.”
올해로 배우생활 17년째. 신은경은 서른하나가 됐다. 망아지 같던 스무살 시절 처럼 그는 여전히 치열하고 용감해 보인다. 그만큼 전복적인 여성상을 보여준 배우는 흔치 않으니까. 이에 대해 신은경은 할말이 많다. 여배우의 수명이 화제로 던져지자마자,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신은경.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템포도 빨라진다. “여배우라는 수식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죠. ‘여자’라는 걸 의식하면 영화의 상황에 완전히 몸을 맡기기가 어려워요. 남자배우의 그늘을 찾게 되고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게, 스토리가 좋으면 얼굴이 잘 안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분’말고 ‘검댕’을 칠하자는 거죠. 멜로말고 다른 장르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이자는 거예요.” 여자이고, 배우이면서, 여배우이긴 거부하겠다는 신은경의 말은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실천해온 그가 세월을 끌어 안는 모습, 연기의 품을 키워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