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내년엔 무대로 돌아가겠습니다,<바람난 가족>의 황정민
2003-08-27
글 : 박혜명
사진 : 정진환

양복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트렌치코트를 늘씬하게 늘어뜨린 채 뒷모습을 보였을 때도 알아보았지만, 희끄무레한 스튜디오 안에서 짙은 슈트를 입고 곧게 서 있을 때 그의 실루엣은 단 한 가지의 느낌을 뚜렷이 풍겼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건축도면. 소매에 잡힌 주름까지도 미리 계산되어버린.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황정민이란 배우가 이 세련된 슈트와 유유상종할 종류처럼 보이진 않았었다 해도, 바람난 변호사 ‘주영작’은 또 다른 황정민 같았으니까.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로드무비>로 넘어갔을 때도 그랬고, <로드무비>에서 <YMCA야구단>으로 건너뛰었을 때도 그랬다. 순박한 드러머 강수, 하염없이 떠도는 청년 대식, 부족함 없이 곱게 자란 착하고 어리숙한 녀석 광태 사이에 고정된 ‘황정민’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스타일이나 수염, 안경 따위의 분장 차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배우로서 그는, 아무 향도 고정된 자태도 없는 물질에 가까운 듯했다.

“이 영화는 또 다른 숙제였어요. 내가 이런 연기도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주영작이란 캐릭터는 나한테 도전이었죠. 얘는 댄디하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요. 그리고 난 다혈질이고 감정적인데, 영작은 자기 아버지도 그렇고 부부관계도 그렇고, 인생에 불편함이 많은데도 내색을 안 하잖아요. 속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었죠.” 처음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 일단은 거절했던 이유다. “노출도 어려웠고. 그건 정말 말 못할 부담감이에요. <로드무비> 때도 ‘남자랑 해서 쉬웠어요’라고, 사람들 앞에서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배우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걱정도 당연히 되고요…. 그래도 대본은 좋으니까 거절하고 나서도 뒤가 찝찝한 거예요.” 말하자면, 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동안에도, 그는 만만치 않은 이 대상을 정복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또 한편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자기만 따라하래. 영작이의 좋은 점들은 변호사인 자기 친구(조광희 변호사를 말함)를 닮은 거고, 나쁜 점은 다 자기라고.”

그렇게 해서 그는 <바람난 가족>과 함께 다시 한번 자신의 무형무취적 질감을 시험한다. 성능 좋은 판박이가 살에 붙으면 그럴듯한 문신이 되듯, 그가 캐릭터 살에 달라붙거나 캐릭터가 그의 살에 달라붙어 두 존재는 서로에게 삭아들어갔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한시름 놨어요. 자신감도 얻고. 배운 것도 많아요. 배우라 함은 연기를 할 때 밖으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게 마련인데,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영화가 무난히 흥행 중이라는 사실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이 인터뷰 기사 제목은 이렇게 달아주세요. ‘잘린 손가락과 장지진 손가락을 웃으며 찾으러 다니는 황정민.’ 편집 기간 중에 그런 얘기 들었거든요. 이 영화 흥행하면 내 손가락을 자른다,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근데 흥행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찾으러 다녀야지.”

이제는 가속도 기어를 넣어야 할 시점일 텐데, 그는 7∼8년간 머물렀던 연극무대를 여전히 사랑하며 동경하고 있었다. “무대로 돌아가야죠. 올해도 대본이 많이 들어왔는데,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하고 정중히 거절했어요. 올해는 좀 힘들 것 같고, 내년 여름이 되기 전에 한편 하려고요.” 그는 다양하지 못한 국내의 공연문화 현실을 ‘개탄’해 마지않으며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관객이 볼 게 연극과 뮤지컬밖에는 없다는 것. 그러니 <델라구아다> 같은 공연이 굉장히 특이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 대학로는 갈수록 죽어가고 있다는 것. “관객은 배우 인지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요. 내가 영화를 열심히 한 다음에 연극을 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더 많이 보러 와주지 않겠어요?” 그는, 둘 중 한 가지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충무로보다 대학로에 남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원석이라고 표현했던 이 무형무취의 배우, 황정민의 맨 얼굴의 느낌을 우린 이제야 알기 시작했고 그 매력을 발견 중이다. 돌아가겠다는 건, 아직 좀 이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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