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야" 명상을 통해 도달한, 어느 경지에 이르러 던지는 진리의 말씀 같은 이 대사는 영화 <거울속으로>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시각적 해석과 내용의 이해를 돕는 결정적인 열쇠말이다. 이 말은 또한 약 500년 된 회화사에서 영원한 화두처럼 사용되면서 때로는 사실보다 더 사실답게(간혹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도록) 그림이라는 형식으로 붙잡아두는 역사를 만들게 했다. 친절하게도 영화는 이런 회화와 이 영화의 핵심적 대사의 친밀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컷에서 재빠른 속도로 몇 회화작품들을 도판으로 넘겨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영화에서는 우영민(유지태)이 사건(?)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구하는 단서로서 얀 반 아이크의 회화작품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소품으로. 회화작품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아마도 직업병 같은 것인데, “어 저 그림은 그 내용과 관계가 없는데”라든지 “어떻게 저 그림을 알았을까?” 하는 잘난 체까지 포함해서 소품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의 속내용을 그림이 간섭하여 전개되는 것은 관계자(?)에게는 좀더 흥미있게 영화를 바라보게 만든다. 사실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의 회화사적 해석은 영화에서 다루는 ‘아!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이곳에 있었군!’ 하는 것과 사뭇 다르긴 해도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보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만지는 것까지 몸이 체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이 경험하지 못한 바깥의 존재가 또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마련이다. 그래서 내 몸이 미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어떤 존재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경외심을 가지고 산다. 우리는 누구의 말씀 이전에 보이는 것이 ‘다-존재’의 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영화를 단 한번만 보고 장면을 기억해내며 사설을 달기란 말같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난 뒤 세개의 장면은 마치 그림을 보고 난 뒤의 잔상처럼 여러 가지 말을 달면서 몸에 붙어버렸다. 감독이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이 기억되는 장면들은 결국 내게 <거울속으로>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하나는 영화 들머리에 해당되는데, 매장에서 쓸데없는 물욕을 부려 피자 커터기를 슬쩍한 여직원이 화장실에서 목을 쓱 그어가며 죽게 되는 일련의 연속적인 장면들이다. 두 번째는 우영민이 어찌어찌하여 쌍둥이 동생 집을 무단침입하여 커튼을 들추어내면서 짠하고 드러나는 ‘거울의 방’ 장면이다. 이 방이 주는 느낌은 분명 영화라기보다 어느 설치미술가의 작품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래서 머릿속의 고장난 태엽장치가 작동하는 바람에 이지현-이정현의 방은 마치 루이 14세가 만용을 부려 만들어놓았다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과 겹쳐지면서 영화의 흐름을 놓치고 미술사의 한 장면을 읽어내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는 영화 마지막 장면이다. 우영민이 죽었다는 암시를 세심하게, 꼼꼼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이미지로 설명하는 긴 연속 장면들인데 갑자기 거울이 아니라 유리 속에 갇혀버린 우영민의 제일 마지막, 끝장면의 우아한 색감이 주는 몽상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감독에게 불만을 가질 뻔했다.
이미지의 아름다움
화장실에서 죽어가는 여직원을 보여주면서 그리고 첫 장면에서 이 영화가 설정한 사건의 공간이 그녀가 슬쩍한 하찮은 물건과 꽤 값어치를 하는 유행상품까지 아우르면서, 현대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백화점을 염두에 둔 것은 우리가 가지는 근원적 공포의 실체를 보여주는 데 적절하다고 찬성하게 되었다. 거울에 반사되는 내 모습이 가지는 근원적 공포란 사실 “내가 더이상 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각인지” 탄식했던 어느 소설 속 주인공의 독백처럼 긍극적으로 소유에 대한 욕망의 흔들리는 좌표가 일으키는 불안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정현이 결국 소유에 대한 욕망의 희생물이었고 또 다른 욕망의 희생물로서 그녀가 선택한 희생자들과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을 보고는(다 보고 나서 다시 재구성하며) 나의 이 탁월한 ‘노가리’가 가지는 억지가 왠지 더 마음에 들었다. 감독의 의지와 관계없이 말이다.
첫 희생자로 등장하는 여직원의 화장실 장면에서 거울 속의 또 다른 존재가 드러나는 그 한컷은 시각적으로 빛의 음영을 이용하여 드라마틱한 연출을 강조했던 카라밧지오의 회화작품을 떠올리게 했는데, 이 시각적 즐거움은 최소한 나에게 줄곧 이 영화의 미덕이었다. 여직원이 갑자기- 스르르- 이유를 알 수 없이 직원 패찰을 떨어뜨려 몸을 숙일 때, 거울 속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또 다른 바로 그녀의 모습은 찰나를 정지시켜놓으면 훌륭한 하나의 회화작품처럼 보였다. 깊은 공간감을 가진 거울 속에서 그녀의 눈과 눈빛 그리고 하얀 셔츠는 명도에 의해 흐물거리며 앞으로 튀어나와 실재감을 주어 잠시 살아 있는 다른 그녀보다 더 사실적인 존재감으로 부각되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목에 피자 커터기를 그어대는 동안에도, 거울을 따라하는 그 모순의 순간에도, 나는 그녀가 거울 속의 그녀보다 약화된, 가벼워진 존재라고 혼자 믿어버리는 혼돈을 즐기고 있었다. 영화가 그걸 원했던 걸까? 이미지의 반란은 사실 이 장면의 모순관계에서 시작된다. 모든 상업광고가 이미지를 통해 호도하며 매진하는 결과란 이 장면처럼 우리가 믿어 의심하지 않으려는 시각적 결과에 대한 혼란이다. 그 사이에 어쩌고 저쩌고 하는 메시지를 살짝 덧입히는 것인데, 그 내용이란 늘 현실적 욕망의 현실적 부재를 이미지가 위로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여직원의 욕망은 이 장면 앞에서 우리가 훔쳐보았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 그다지 놀라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지태가 커튼을 들추어보게 되는 거울의 방은 나를 도취되게 만들었다. 사실 거울을 그렇게나 많이 벽에 달고 산다면 다음 다음 장면에 같은 방을 보면서 형사가 던진 대사처럼 ‘미친 사람의 짓거리’로 단박에 판단하겠지만,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 같은 방을, 미술가의 상상력을 탐험하기 시작할 거다. 늘 그랬듯이. 이 장면에서도 잘 만들어진, 완성도 있는 작품을 대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디테일이 강조된 텍스타일의 붉은색 벽지 위에 채도 낮은 다양한 색감들의 크고 작은 여러 크기를 가진 액자 속 거울들이 방 하나 가득 있어 거울에 비추어진 사물의 경계를 지워내고 거울 그 자체만 유일한 하나의 사물이 되어버린 밀도 높은 공간의 아름다움이 그 장면에 가득 배어 있었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 거울들이 가지는 회화적 상상력과 관계없이 시간과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나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식> 작품 도판이 회화적 해석과 관계없이 영화적 소품으로 생명력을 가지듯이 이 장면은 영화와 관계없이 완결된 미술작품으로 생명력을 가진 채 기억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야”라는 결정적 대사처럼 이 장면은 눈에 보이는 것 ‘다’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다’가 하나로 통합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속성상 시간의 개입으로 인해 장르적 설명이 쓸데없이 장황설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미술작품에서 시간의 개입이란 보는 이의 입장일 뿐이어서 작가의 입장에서는 굳이 긴 사설을 붙여 작품을 설명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따라서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개입이 영화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이 거울의 방은 보이는 모든 거울이 실체이며 존재이고 그 거울에 비추어지는 또는 비추어질 모든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반영일 뿐이어서 이미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함께 존재한다. 하나의 공간에서. 이지현은 그 많은 거울 속에 제 언니 이정현이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존재의 부재감이자 반영된(쌍둥이니까) 실체의 허상이며 사물의 존재 앞에서 왜소해지는 인간의 존재적 상실감이기도 하다. 그녀는 언니를 더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욕망의 좌표가 상실된 지점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거울의 방은 이지현이 상실한 좌표를 시각적으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이 생각은 영화가 끝나면서 갑자기 그렇게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글을 쓰면서 더 그렇게 확신하게 됐다).
또 하나, 짓궂은 상상력이기도 한데, 거울의 방이 부르주아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는 억측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낙성이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궁전의 ‘거울의 방‘을 보면서 실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비싼 거울들을 그렇게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과 경제력에 대한 경외심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곤 수많은 촛불이 그 많은 거울에 반사되어 너울거리는 환락의 밤을 영원히 잊지 못했을 터이다. 지금 그곳을 가보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당시 그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이타성을 보면서 계급에 대한 만족을 만끽했을 것이다. 반사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고스란히 반영했을 것이니까. 아직도 거울을 통한 이타성의 확인과 그로 인한 자신의 정체성을 즐기는 습관은 남아 있어 개업축하, 인사차 전해주는 선물에 유려한(?) 글씨를 새겨넣어 보내는 대형 거울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왜 이 쓸데없는 생각이 영화 속 이지현의 방을 보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까?
유리/거울/진열장
이지현과 이정현이 부엌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사진 밖을 바라보며 함께 찍힌 사진이 몇번 반복해서 나온다. 영화 말미에 가서, 병실에서 우영민이 이지현인지 이정현인지 모를 바로 그녀에게 이 사진을 보여줄 때 그녀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나는 솔직히 옥의 티를 잡아낸 줄 알고는, 전화해주어야지 했다. 그러나 이건 이런저런 단서들을 촘촘하게 배열하며 결국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친절하게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었던 거다. 거울의 속성을 매개로. 관객보다 더 놀라고 더 의아해하는 우영민은 극중에서 그 혼돈을 감추지 않는데, 사실 그에게는 존재의 부재감을 느낄 만한 어떤 이유가 영화 내내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총에 죽어간 동료 경찰 때문에 힘들었을 뿐이다. 그것도 악령이 되어 그를 괴롭힌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죄책감으로. 그런데 갑자기 그런 우영민이 거울의 안팎 그 사이에 끼어 존재에 대한 괴로움을 보여준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이정현이 되려고 한 것일까? 하여튼 우영민은 거리를 바삐 활보하는 사람들을 거울이 아닌 유리(진열장)에 갇혀 거울(진열장 유리) 밖으로 손을 더듬으며 뻗쳐보려 한다. 우아한 황금색조의 공간 안에서. 이 장면들은 소유의 욕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현대인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나는 그렇게 보이고 그래서 영화가 더 좋아졌다). 아마도 그래서 유지태는 진열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 삶의 총체성마저 소유의 욕망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희롱하며 한편으로 위무하기 위해 몽환적인 황금색조로 마지막 장면을 수놓듯 아름답게 꾸미기를 결정했는지 모른다. 거울 속에서는 원래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