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바람난 가족>
2003-08-28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가정에 개인주의를 허하다

이 영화는 세태고발극이 아니다. 따라서 “현실을 얼마나 그대로 재현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어설픈 리얼리즘-전형성 논쟁을 펼치는 것은 소모적이다. 그보다는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얼마나 유효적절한지를 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곱씹는 것은 사실 불편하다. 그러나 “몰랐을 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다”는 아들에게 호정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사실이니까, 너만 모르는 것은 불공평하니까.”

“입에도 담지 못할 음탕한 소리”를 하리라는 말에,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이 바로 따라붙을 만큼, 이 영화 안에는 성과 정치가 공존한다. 50년간 밀봉되었던 유골을 헤집는 심정으로 가부장제의 유재(遺財)를 까발리는 이 영화의 몸틀은 성정치학적 이슈로 가득 차 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이후 이렇게 야하면서도 웃기고, 대단히 정치적인 영화가 또 있었던가? 그런데 이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람난 가족>은 가족의 본질을 규명하며, 이제 가족윤리를 넘어 새로운 개인윤리를 정립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가족주의와 개인주의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월급 65만원을 받아 아내와 두 아이,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의 자랑은 “처남”이며, 절박한 사정을 하러 “온 가족”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복수를 위해 상대의 “아들”을 죽이고, “엄니…”를 부르며 울부짖는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사죄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이다. 그는 ‘그’이기 이전에 ‘그의 가족’이다. 그가 온전히 개인이었던 순간은 “대학노트 세권에 달하는” 유서를 쓰고 투신하였을 때뿐이었으리라.

여기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누가 누구에게 생계를 걸고 있진 않아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남의 인생 참견말고, 남의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 그들은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위해주며” 산다. 남이야 뭐라든 시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술 담배 끊지 않고, 시어머니는 15년 만에 새 파트너와 섹스를 하며, 남편은 “별 문제될 것 없이” 다른 여자 좀 만난다. 아내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산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남편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연접하는 독립된 개인들이다.

여기 양극단의 축을 이루는 두 가족이 공존하다, 마침내 기이하게 충돌한다. 길바닥에 늘어진 죽은 개 마냥, 피할 수 없이 직면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선 관대한 척 매끄럽게 빠져나가던 “신원 확실하신” 그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승강이 끝에, 50년 유서 깊은 구덩이에 빠지듯 가부장제라는 허당을 짚고 실족한다.

가족은 무엇으로 구성, 운위되는가?

영작의 할아버지는 처와 딸 여섯을 두고,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으나 이후 그들은 생사조차 모르고 산다. 가부장제의 핵심 요소인 父-子만 추려왔건만 왜 그들은 가족을 이루지 못했을까? 父-子는 가부장제의 핵심이긴 하지만, 가족의 핵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남녀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차를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녀에겐 있으나 그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첫째, 자족감이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질주한다. 고양이처럼 알몸으로 카펫을 뒹굴며 자기 몸의 충만감을 즐긴다. 남편 옆에서 자위를 할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자신의 성욕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남편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며, 반드시 타자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영작은 항시 타자를 욕망하고 필요로 한다. 그는 애인에게 “쿨한 척하지만 진짜 외롭죠?” 소릴 듣는다. 아버지의 임종에서도 “간호사년의 치마를 벗기는” 상상을 하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안 날, 룸살롱 소파에서 바지가 벗겨진 채 눈을 뜬다. 아들이 죽고 나자 애인에게 “내 안의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 미치겠다”고 애걸하고, 애인에게 쫓겨나자 비서를 찾는다. 그에겐 자기 충만감이 없다. 호정의 자족감은 그를 열패감에 빠뜨린다. 그의 실존적 열등감은 아들이 죽자 도덕적 열등감과 결부되어 유치하게 폭발한다. 그가 호정을 때리면서 했던 말은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니?… 내가 용서가 안 되지?”였다. 그가 “자기 생각하며 자위했다”고 말하는 애인, 나아가 더 만만한 비서를 찾는 것은 (유전적 성향일 수도 있지만) 호정에게 느끼는 열등감의 발로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그의 마지막 발 동작 역시 이미 <피아니스트>에서 보았듯, 개망신당한 남자의 무안 수습용 오버 제스처에 불과하다). 남자(들)는 자족하지 못하므로, 욕망이 밖을 향해 발산될 뿐,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둘째, 친밀감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원대로 술을 사드리고, 토한 피를 닦아준다. 그녀는 병실에서 남편을 다독인다. 시어머니의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듣고 지지하며, 아들에게는 진심이 통하는 엄마였다. 영작은 아비의 몸을 닦다가도 아비의 허세에 짜증을 내며, 피를 토하자 “호정아!”를 찾는다. 어머니 이야기가 듣기 싫어 이불을 파고든다. 거짓말하는 그는 아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그는 성적 관계가 아닌 사적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에 무력하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사적 친밀감은 가족을 운위하는 핵심요소이다. 영화에서 보듯이 남자는 친화력이 떨어지며, 친밀감의 담지자는 여자이다(애인 왈, “남자는 나이든 유부남이라도 미성숙하다” 인정?)

셋째, 재생산 능력이다. 부부는 불임이었으나, 둘 다 다른 상대와 임신이 가능했다. 호정의 아이는 태어나 호정과 가족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영작의 아이는 제거되고 만다. 왜? 남자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 아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생물학적 재생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셈인데, 생산수단은 항구적이고, 노동력은 일회적이다(생산수단을 가진 여자를 남자가 전유할 때만이 남자의 욕망과 의지대로 재생산이 가능하다. 여자를 전유하기 위한 인위적 장치가 바로 노동시장에서의 축출을 통한 경제적 박탈과 가부장 이데올로기이다). 이렇듯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족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핵심은 여자에게 있다.

영화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가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이 가족을 통해, 성인남성 취업노동에 전 가족의 생계가 달린 자본주의적 압박과 가족주의의 이름을 단 가부장-이데올로기가 소거된 상태에서, 여전히 가족을 구성하고 운위시키는 본질이 무엇일지 보여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성인남성 노동의 세가 약화되고, 호주제 폐지 등 가부장-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시점에서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관계가 아닌 새롭게 재편되는 가족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호정과 아들의 관계에서 보듯이 생물학적 토대를 차치하고서라도 가족 내부의 친화력은 여자에 의해 담지됨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여성이 중심이 되어 친밀감을 교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그려볼 수 있다.

문제는 개인윤리이다

호정은 기존의 바람녀들과 다르다. 최악의 캐릭터인 <밀애>의 ‘미흔’과 비교해보자. 그녀는 혼전에도 남편밖에 몰랐고, 남편의 외도를 알고 하늘이 무너진다. 옆집 남자에게 찍혀서 순전한 성관계를 시작하고, 들키자 변명 지껄이다 찍소리 못하고 두들겨맞는다. 빈 몸뚱이로 쫓겨나, 아이마저 포기하고 질질 운다. 남편에게 그랬듯이 새 남자를 철석 같이 믿다가 혼자가 되자 그를 ‘특별히’ 그리워한다. 호정은 다르다. 혼전에 놀 만큼 놀아봤으며,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바람 피운다고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일과 취미를 즐기며, 아들과 시부모에게 자기희생이 아닌, 친밀감과 신뢰감을 교환한다. 그녀는 훔쳐보는 옆집 고딩에게 따라가서 먼저 말을 건다. 그와 다짜고짜 성관계만 가진 것도 아니다. 아무도 안 보는 괴로운 고딩영화 <눈물>을 같이 보고, “술 마시고 개길 수 없는” 곳에 서서 고기 먹고, 밤 등산가서 야경보고, 책과 영화 이야기를 하며, 그의 성적 호기심에 응해주는 등 사랑을 했다기보다 우정을 나눈 셈이다. 그는 그녀가 믿고 따를 일종의 ‘아버지’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제 와서 비열하게 그런 말 할 수 있냐?”며 ‘적반하장론’을 펴고, 시아버지 유품인 피아노 하나만 덜렁 남기고, 짐 챙겨서 집 나와 남편과 무관하게 아이를 낳고 살 것이다(혹자는 그녀가 만만한 고딩과 사귀므로, 섹시한 의사를 사귄 ‘미흔’처럼 제대로 바람이 난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거야말로 남자의 시각이다. 상대가 남편이 보기에 그럴듯한 놈인지 아닌지는 남편의 시기심과 관계가 있지, 그녀의 해방과는 무관하다. ‘남편->애인’으로 의존상대를 바꾸는 것은 해방이 아니다). 호정이 지금까지의 불륜영화 속의 여성캐릭터와 다른 점은 남편과 남자를 자신의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녀는 단죄되지도 처벌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이 영화 속 여러 인물들에 의해 돌림노래처럼 말해지던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 위해주며 살기”, “몸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내 인생 내가 책임지기”, “인생 맨 정신으로 살기”, “내 인생이나 똑바로 살기” 등의 정언 명제들을 상당히 체현한 듯 보인다.

이 영화는 가족의 본질을 보여주며, 나아가 ‘화목한 가정’을 목표로 삼는 외재적 가족윤리에서,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내재적 개인윤리로, 윤리의 단위가 바뀌어져야 함을 제안한다. 진짜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해질 것인가? 연애가 답이면 연애를 하고, 가정이 답이면 가정을 꾸려라. 그러나 남에게 “재수없게 연설”하지 말고, “네 아버지 탓”도 하지말고, 오지말라는 애인에게 “내가 미쳤었나보다”며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지도 말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며, 맨 정신으로, 솔직하게 사는 것”이 “이제 짐승의 시간은 관두고, 사람답게 사는” 최소한의 개인윤리이지 않겠냐고 감독은 ‘바람’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대답은? 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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