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불어라 봄바람>의 김승우&김정은
2003-09-03
글 : 심지현 (객원기자)
사진 : 정진환
오버의 달인, 코미디로 귀환

김승우와 김정은이 사이좋은 오누이의 모습으로 스튜디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이유는 너무나 당연했다. 웃기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웃기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터를 켜라>와 <가문의 영광>으로 코미디 왕국의 영주로 군림하게 된 두 김의 이력은 당연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방송에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김정은이 뻔한 수순처럼 스크린으로 옮겨와 <재밌는 영화>를 찍었을 때 기자들은 그녀가 ‘짭짤한’ 외출을 마치고 곧 귀향하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4편의 필모를 갖게 된 지금도 우리는 그저 그녀가 언제쯤 다시 방송으로 돌아갈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스크린 진출이 선택 이전에 생존의 문제였다고 토로한다. <재밌는 영화>를 찍기 전 방송활동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마지막 활로로 영화를 택한 것이라는 김정은의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배우경력 13년째인 김승우의 행보도 수수께끼인 건 마찬가지. 21편의 필모 중 그가 과감히 잘생긴 얼굴을 포기한 두편의 영화, 그것도 코미디영화가 떴다는 사실은 비애감마저 안겨주는 대목이다. “한국형 루저(loser)의 표상을 제시했다”는 거창한 해설이 붙은 <라이터를 켜라>의 성공은 김승우 자신에게도 얼떨떨한 행운이었다. 오랜 시간 멜로 배우로 살아온 김승우의 얼굴은, 과거를 기억할 새 없이 스크린 안에서 일그러지고, 쭈그러져 이제는 번듯한 폼새가 어색할 지경이다. <가문의 영광>을 찍고 난 뒤 김정은에게는 엄청난 ‘미션’이 담긴 시나리오가 답지해 그녀를 질리게 만들었다. <나비>를 택한 이유도, 부담스런 코믹퀸의 자리를 탈피해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역전에 산다>와 <나비>의 흥행 실패는 두 사람에게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연기를 펼치는 것이 좋다는 회유를 은근슬쩍 가해왔다. 이제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버해야 관객에게 먹힐 것인가, 무얼 더 보여줄 수 있을까, 코믹 연기 외에 다른 걸 하더라도 관객이 날 찾아줄까 하는. 아무리 코믹 연기로 떴다지만 계속 이 길을 고집하는 게 위험한 일임을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불어라 봄바람>은 그 웃긴 알맹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고민이 맞물리는 지점에 위치한, 한없이 무거운 영화다.

밀키 보이에서 초라한 소심남으로 변신 완료,김승우

처음엔 이 어눌한 늑대의 꿍꿍이가 궁금했다. <라이터를 켜라>의 허봉구, <역전에 산다>의 강승완에 이어 <불어라 봄바람>에서의 선국 캐릭터까지 직업만 바뀌었을 뿐 죄다 비슷한 역할만 맡아대는 그의 속셈 말이다. 변신은 (무죄가 아니라) 필수라는 강박증이 배우들에게 있을 법한데, 유독 그가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요즘 제 연기에 만족해요. 사람들이 절 보며 ‘맞아, 우리 옆집 아저씨가 딱 저래’, ‘우리 동네 형, 술만 마시면 저렇게 깽판 치고 주정 부리지’라고 생각하면 그걸로 됐어요. 코미디영화만 한다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게 지금의 주류잖아요. 괜히 다른 길로 갈 필요없죠.”

무엇보다 <불어라 봄바람>을 택한 배경에는 ‘장항준’이 있었다. 그를 최고의 코미디 배우로 등극시킨 한편의 영화 <라이터를 켜라>는 김승우에겐 “감독에게 죄송하고 미안한 영화”이자 마음의 빚이었다. <라이터…>를 찍으면서 동시에 <예스터데이> 촬영에 임했던 김승우는 장 감독의 애를 무던히도 태웠다. 오죽했으면 영화가 개봉된 뒤, 장 감독이 농담 반 진담 반 “앞으론 스케줄 한가한 배우들하고만 작업하고 싶다”고 했겠나. 기회가 생기면 꼭 빚을 갚겠노란 김승우의 약속은 곧 현실이 됐다. 지난해, 겨울의 끝 무렵에 <불어라 봄바람> 초고가 넘어온 것이다. 읽어보니 어땠냐고 묻는 장 감독에게 김승우는 딱 한마디만 했다. “제목 죽이는데.” 실은 마음속으로 그랬단다. 아무리 허접해도 빚 갚는 심정으로 같이 해주겠다고. 올해 1월에 수정된 시나리오가 들어왔고, 감독은 4월까지 기다려주겠노라고 했다. <역전에 산다> 크랭크업까지의 암묵의 배려였다. 그렇게 다시 뭉친 감독과 배우는 서로의 속을 너무 잘 알기에 전작보다 훨씬 수월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장 감독은 대체로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김승우에게 애드리브를 맡기는 편이었다. 웬만하면 다시 가자는 말을 안 하는 장 감독이지만, 유일한 와이어 액션신에서 “다시 한번!”을 외치다 김승우를 ‘잡을’ 뻔한 일도 있었다. 이날의 달리기 장면은, 샤워를 하던 선국이 자신의 비밀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 화정의 다방으로 황급히 달려가던 중 차를 뛰어넘는 장면이었다. 머리에 비누거품까지 잔뜩 묻히고 와이어에 의지해 4m 높이에 올려진 김승우가 추락한 것은 당일의 모든 촬영을 마치고 좀더 완벽한 컷을 만들어내기 위해 “한번 더”를 외치던 순간. 다행히 평소 체력관리가 철저했던 김승우 덕에 골절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무릎 인대가 파열돼 한달여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현장 분위기가 좋아서 그냥 넘어갔죠. 안 그랬음 배우 관리 부실했다고 한바탕 뒤엎을 사건이었죠. 현장에선 다치면 안 돼요. 다친 사람만 손해니까. 안 그래도 무척 조심하는 편인데….”현란한 애드리브에, 몸을 돌보지 않는 액션신도 모자라 김승우는 이번 영화에서 노메이크업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나이를 숨길 수 없어 눈가 주름도 보이고 하루 세갑 피운다는 담배 탓에 피부가 거멓게 죽어서 나왔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다. “예전에 제가 TV드라마 <신데렐라>니 <신귀공자>니 찍을 땐 꽤 반반했거든요. 그땐 남자들이 절 싫어했어요. 밀키 보이의 이미지도 그렇고, 자기 여자친구들의 시선을 빼앗아간다고 해서. (웃음) 그렇지만 지금은 남자들이 오히려 반기죠. 현대인의 초라하고 소심한 모습을 저에게서 발견하나봐요.” 나중에 더 나이 들면 이나마 코미디 연기도 힘들어지리라. 그는 나이가 더 먹기 전에 폼나는 연기 한번 해봤음 한단다. “얼마 전에 <나쁜 녀석들2>를 봤는데, 슬로모션 엄청 나오더라고요. 그런 영화에 출연해서, 얼굴 더 망가지기 전에 반반한 역할 해보고 싶어요. 과장된 액션이나 포즈말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가죽잠바 하나 걸치는데도 조금 느릿한 화면으로 폼나게 잡아내는 영화. 김성수 감독 스타일의 영화 말예요.” 그가 그런 영화와 인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장군의 아들>로 데뷔해 <깊은 슬픔> <젊은 날의 초상> <남자의 향기>까지 폼나고 반반한 역할은 오랜 시간 그의 몫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더이상 코믹함이 어울리지 않게 될 때 그땐 예전에 했던 멜로 연기를 해야겠죠. 그래도 가식적인 연기는 이제 피할 거예요. 폼 잡아도 진솔하게, 크게 주류를 거스르지 않는 장르 내에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보여줄 겁니다. 꿍꿍이요? 그런 거 없어요. 제가 계산 같은 거 무지 못하거든요. 다만 현실감각이 조금 더 생긴 거뿐이겠죠. 어차피 배우는 선택되는 존재, 원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존재잖아요. 여러분이 원하면 거기에 가 있을 겁니다.”

코미디 홍수 속에서 코믹 연기의 길 찾기,김정은

<불어라 봄바람>은 김정은의 네편의 필모 가운데 세 번째 코미디영화다. 지난해 가을 <가문의 영광>에 출연하면서 여배우로서 드물게 코미디 연기의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올해 초 신파멜로 <나비>에서 돌연 심각한 연기로 돌아섰었다. 확실한 ‘변신’이었지만 그 과정엔 큰 망설임도 있었다. “자만심이 충만했던 시절이었지만, 잘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못하겠다, 이러이러한 것들이 어렵고 이랬으면 더 좋겠다고 길게 써서 영화사 대표님한테 이메일로 보냈죠. 그랬더니 제가 바란 쪽으로 모양새를 바꿔주신 거예요.” 전작의 흥행 성적이 기대치를 높인 탓에 영화는 전국 극장에 와이드 릴리즈로 걸렸지만 결과는 예상보다 안 좋았다. “속상했어요. 이럴 땐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 하나, 정말 난감하더라구요.” 무조건 만들어놓고 ‘우리 열심히 했으니까 잘했다고 인정해달라’는 말이야 투정에 불과하겠지만, “뭐든 열심히 하면 다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꺾인 뒤였다.

<불어라 봄바람>이 김정은의 ‘안전한 선택’처럼 보인 것은 그 때문이다. ‘아직은 변신의 때가 아니며 변신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은 그에게 정답이었을 수도 있다. 여러 배우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듯 “배우는 선택받는, 수동적인 직업”이라는 속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나비>의 촬영이 마무리되어갈 때쯤 그가 받은 시나리오의 대부분은 “어디선가 해본 듯한” 것들이었다. 누가 누굴 납치하거나, 굉장히 야하거나, 일대 소동이 일어나거나.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코미디라는 건 알지만 여기서 뭘 해야 더 웃길 수 있나, 이보다 더 센 게 있나, 혼란이 오더라구요.”

<불어라 봄바람>도 코미디영화 시나리오였다. “소설가와 다방레지의 사랑. 뻔한 얘기잖아요. 그렇지만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시나리오였어요. 별거 아닌 일들이 아기자기하게 표현돼 있는 것도 기발하더라고요.” 그는 이 영화를 ‘현실성 있는 코미디’라고 말했다. “‘화정’이란 캐릭터도 맘에 들었어요. 너무 사랑스럽잖아요. 그리고 의외죠. <가문의 영광>에선 제가 얌전히 있다가 나중에 와아∼ 하고 돌변하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제가 행동으로 크게 뭘 보여주지는 않거든요.” 행동으로 뭔가 보여주지는 않는 캐릭터와 아기자기한 이야기. 그것은 이 영화가 그 자신에게 이전 것들과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암시였다. “이제까지 제가 해온 건 감독님이 ‘한번 해볼래?’ 그러면 제가 막 오버해서 만들어내는 것들이었는데, 이번 감독님은 별로 요구를 안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다 맡겼어요. 제가 한 건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처음엔 적응이 안 됐죠.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나, 내가 뭔가 더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의아하고 불안하더라구요. 나중엔 오히려 그게 편해졌어요. 예전에는 그랬거든요. 정말 잘해야지! 이번엔 이렇게 해보고, 다음엔 저렇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할게요!’ 그랬었어요.” 그래서였나보다. 그가 보여줬던 모습들 가운데 이 영화의 ‘화정’이 가장 편안하고 예뻐 보였던 이유가. 굳이 “감독님, 다시 할게요!”라고 의욕적으로 덤비지 않더라도 영화를 찍는 방법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맞다라고 했던 게 자만이었던 거 같아요. 타협없이. 내가 먼저 앞서는 거 있잖아요. 영화 만들면서는 그런 게 행복하지만 한계가 있는 거 같아요. 그런 건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거잖아요. 관객하고 주파수가 안 맞을 수도 있는 건데.”

남자주인공들 틈바구니에 낀 애매한 조연이라면 몰라도 코미디영화 전면에 내세워질 수 있는 주연급 여배우들은 많지 않다. 예쁘장한 멜로를 보여줄 여배우들은 많되 두편 연달아 ‘망가져’줄 여배우도 흔치 않다. 말하자면,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영화계에서 그 장르에 능한 여배우가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 현재로서는 어느 정도 보장돼 있는 셈이다. 본인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코미디만 2∼3편 하더라도 답습은 하지 말자, 업그레이드돼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식상해하기 전에 제가 먼저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이거 내가 어디선가 했던 거다. 그러고나면 다른 걸 찾아보게 될 거 같아요.” 그럴 수 있는 여유는 <불어라 봄바람>과 함께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을 좁혀가는 일은 대부분의 상업영화 배우들이 고민하는 것이지만, 그의 경우는 “관객에 대한 예의로 조금씩 다르게” 업그레이드해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남들이 응원해줄 때라야 더 잘할 용기가 생긴다는 그에게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나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떨쳐내며 나름의 선택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은 오해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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