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인터뷰] 이정재, “감독님, 화끈한 역 없나요”
2003-09-05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사진 : 김태형 (한겨레 기자)

입을 다문 이정재에게선 언뜻 <젊은 남자>에서 출세 욕망에 사로잡혔던 냉혹한 청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다가도 가늘어진 눈꼬리가 처지는 순간 단단한 갑옷 속에 감춰진 여림 같은 게 스쳐간다. 그러니까 이정재는 야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순간조차 ‘저 사람 마음 한구석은 순수할 거야’라는 느낌이 드는 배우다.

대중영화라는 틀 안에서 완화되긴 했지만 <오! 브라더스>(5일 개봉)의 흥신소 직원인 3류인생 오상우에도 마찬가지의 느낌이 있다. 겉으론 야비한 인생을 살지만, 진짜 잔인하지는 못한. 아무도 믿지 않고 불륜현장 사진이나 찍어 살다가, 조로증 환자인 이복동생을 만나 세상과 사랑을 믿는 마음을 되찾는 상우역을 맡은 이정재는 정말 잘 맞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편한 모습이다.

“사랑의 유형이 다 나오는 영화거든요. 부모·자식, 친구, 형제, 이성간의 사랑까지. 편집과정에서 부자와 형제간의 사랑만이 부각돼 아쉽긴 한데, 그래도 만족스런 편이죠. 특히 이범수·이정재 두 명이 나오면서 어디 치우치지 않고 둘다 돋보이게 나왔다는 면에선 만족이에요.” 원래 ‘가족영화’라 생각했던 것보다는 코믹한 코드가 많아졌다. “내 생각보다 훨씬 앞서 설정해온 이범수씨와 맞추다보니 조금 더 그쪽으로 간 건데 시사회에서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대목을 보면서 범수씨가 대중과의 호홉을 아는 배우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젊은 남자>부터 <오! 브라더스>까지 9년동안 14편의 주역을 맡아온 이 배우는, 자신에 대해선 냉정하다. “조금은 연기가 나아졌겠죠. 어느 배우나 한 작품 할 때마다 나아져요. 근데 자기자신은 그 변화가 굉장히 크게 느껴져도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니지 않나요 ”

어떤 이는 배우를 천직으로 알고 꿈꿔오지만 어떤 이는 그냥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걷다가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이정재는 후자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나 장사 하면서 살지 않을까 했는데 가끔 뒤돌아보면 재미있어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인생이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내 눈은 하늘꼭대기에 붙어 있는데 내가 하는 짓보면 성에 반도 안 차고, 적성이 아닌가보다 생각도 했어요. 근데 <태양은 없다> 정도부터 내 의지 같은 게 생기더라고.”

이전엔 조급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자꾸 부드러운 역할만 할 땐 “아, 다시 <모래시계> 같은 역 해야 하는데 싶기도 하고. 폭력적인 면이 있는 남성이나 선굵은 연기를 하고 싶은데, 역이 들어와야죠. 그런 영화도 적고. 현장의 스타일은 좀 차이가 있지만, 전 박광수 감독 같은 분의 인물접근을 좋아하거든요. 인물에 고민을 실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심지어 내가 시나리오 만들어볼까도 생각했다니까요.”

30대에 들어서일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운명론’을 믿어서일까. 이정재는 이제 그런 조급함은 털어버린 듯 했다. “<어바웃 슈미트> 너무 재미있게 봤는데 보고 나오면서 그랬다니까요. 맞아, 인생 제 맘대로 풀리는 거 아니라니까.” 바꿔말하면 모든 게 “내가 열심히만 준비하고 있으면 언젠가 때가 있고 자연스럽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 이정재는 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그 때가 오면 어떤 모습일까. “표현이란 게 제일 쉬운 건 대사고 그다음 표정, 액션인 것 같아요. 가장 고급스러운 건 가만 있어도 느낌이 전달되는 연기잖아요.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이번 영화 보더니 사람들이 아직은 얼굴이나 몸에 세월같은 게 안 느껴진다 하더라고.” 겉으로 보기엔 느긋해 보여도 속은 욕심으로 꽉 차 있다. 그의 나이들어 가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볼 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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