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현실을 직면케 격려하는 세심한 판타지,<케이-펙스>
2003-09-12
글 : 김종연 (영화평론가)
■ Story

맨해튼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얼핏 멀쩡해 보이는 사내 ‘프롯’(케빈 스페이시)이 이송된다. 스스로를 ‘케이-펙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 지적이고 확신에 찬 특별한 환자는 이내 다른 환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게 되고, 애초 그를 치료받을 환자로만 여기던 정신과 의사 마크 파웰(제프 브리지스)마저도 그의 주장이 과학적 사실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알자 혼란스러워진다. 프롯이 케이-펙스로 복귀하기로 한 날이 가까워지자 환자들은 그와 함께 떠날 생각에 흥분하지만 마크는 그에게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한다.

■ Review

선글라스를 끼고 다소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케빈 스페이시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케이-펙스>는 <X파일>이나 <E.T.>가 아니다. 관객 서비스 차원에서 두어 신이라도 나올 법한 비행접시나 외계인의 모습 같은 것은 어설픈 CG로라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떼돈 들이부어 다른 천체를 향해 날아갔던 <컨택트>가 기본적으로 조디 포스터의 마음속 깊은 곳 아빠 만나기 프로젝트였듯, <케이-펙스>의 광속 여행이 도달하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정신이다. 다만, <케이-펙스>에선 웅장한 차원이동기계 대신 밝은 조명과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비극을 경험한 한 개인이 견고한 망상에 빠져들어 현실을 그대로 지각하지 못한다든가 자기 자신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한다든가 하는 ‘망상(妄想) 스토리’는 사실 여러 가지 종류의 이복동생들을 가지고 있다. 그 흔한 ‘기억상실증 환자’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며 비참한 현실과 로그아웃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에 로그온한다는 점에서는 <매트릭스>나 사이버 펑크, 가상현실 관련 영화들도 ‘견고한 망상 스토리’의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설령 그 ‘망상’이 정말 망상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다. 프롯이 정말 외계인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이 영화가 여러 면에서(제프 브리지스가 거의 비슷한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을 포함해) <피셔킹>을 연상케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망상이 영화에서 선호되고 있는 이유는 자기 완결적인 망상의 세계에 빠진 한 사람이 보여주는 이질적인 관점 때문에 뉴욕의 거리와 같은 심상한 공간조차 이상한 요지경처럼 보이게 만드는 특별한 효과 때문이다. 물론 이 만화경 속 숱한 아이러니와 페이소스가 교차한 뒤 포착되는 것은 현실의 정경(情景)이다. 결국, 사회의 주변부나 타자를 등장시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현대적 우화를 쓰려는 셈이다. 그 점은 현대 문명의 수레바퀴에 깔려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모여 있는 폐쇄된 공간, 정신병원을 영화가 주무대로 하면서 이중으로 확인된다.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프롯. 지구의 빛이 너무 밝아 절대로 선글라스를 벗을 수 없다는 그는 유쾌하게 밝은 성격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망상은 화면 안에서 자체적이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이 화면, 즉 영화가 세계 속의 액자이므로, 영화 속 망상은 현실 속의 영화의 은유이며 망상이 어떻게 그려지느냐는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전망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망상 구조의 영화가 결국 인간 절망과 고통에 대한 ‘구원’을 포함하게 될 것은 프롯이 정신병원에서 단 한명을 ‘케이-펙스’로 데려가겠다고 공언하는 것처럼 예상 가능하다.

<케이-펙스>가 그려내는 세상의 우화는 <지구를 지켜라!>에서처럼 비참한 현실과 대구를 이루며 슬픔으로 침강하지도 않고 외계보다 더 외계 같은 세상의 부조리에 던져진 진짜 외계인의 블랙코미디로 빈정거리지도 않는다. 대신 일견 익숙한 할리우드 버전 희망가를 부르려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거나 희망의 ‘파랑새’를 찾으라고 충고할 때까지는 적어도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프롯의 ‘존재증명’에 많은 공을 들이면서 ‘망상’이 줄 수 있는 싸구려 구원을 피해가려고 애를 쓴다. <코쿤>이 걸어갔던 아름다우나 대책없는 현실도피로도, 로빈 윌리엄스에 의해 대표되는 착하고 모범적인 결론이지만 밑이 훤히 보이는 뻔한 긍정의 길로도 가지 않는다.

<피셔킹>과 유사해질 수도 있었던 영화가 로빈 윌리엄스가 아닌 케빈 스페이시를 기용하면서 얻은 변화도 ‘도피’로 빠져들지 않고 섣부른 ‘구원’을 말하지 않으려는 아슬아슬한 균형의 태도와 무관치 않다. 세상의 비참함을 아름답게 윤색하지 않으면서도 도피하지 않는 결론, “당신은 이곳에 남아야 하며 해야 할 일이 있다”라는 메시지에 약간이나마 힘이 실렸다면, ‘돌아갈 집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베스의 구원이 충분히 예상 가능하면서도 감동적이라면 그 때문이다. <케이-펙스>는 영화가 세상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전망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장 온건하고 익숙한 해답을 제출한다. 소극적이거나 어정쩡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현실을 직면하도록 격려하는 세심한 판타지를 만나기는 사실 어려운 법이다.

:: <케이-펙스>의 원작은

진 브루어의 동명소설 영화화

<케이-펙스>는 95년 진 브루어(Gene Brewer)가 쓴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구루(guru)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지적이고 신비한 캐릭터 프롯의 흡인력으로 소설은 큰 인기를 얻었고 영화제작자 로렌스 고든이 관심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작소설은 맨해튼 정신병원에 몸담은 정신과 의사 진 브루어가 자신의 특별한 환자 프롯과 행했던 16가지 단계의 심리치료과정을 리포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에서 진 브루어는 프롯이 환자라는 생각에 대해 흔들림 없이 임하는 ‘의학 탐정’의 모습인데 환자 프롯에게 영향을 받는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한 마크 파웰은 영화제작 과정에서 추가된 캐릭터인 셈이다.

의도적으로 저자 자신의 이름을 화자로 정했기 때문에 출간 초기에는 실화냐 아니냐로 화제가 되었던 이 소설은 끝까지 프롯이 정말 외계인인지 아닌지 정말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아 끝없는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거의 진짜 외계인임이 분명하게 보였던 첫 번째 소설에 대한 결론을 완전히 뒤집는 2편이 영화 개봉 직전에 출간되어 다시 화제가 되었다. 이것은 영화제작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한 진 브루어의 상업적 고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글라스를 벗어두고 돌아온다는 약속을 했던 프롯이 약속대로 5년 뒤 맨해튼 정신병원에 나타난 2편에서는 다시 16단계의 심리치료과정을 통해 프롯이 실은 로버트 포터의 다중인격 중 하나라는 쪽으로 결론을 맺고 그의 분열된 자아를 치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2002년에 다시 출간된 <K-pax3: 프롯의 세계>편은 이를 다시 뒤집는 듯한 결론을 통해 프롯이 환자들 100명을 데려간다는 내용이었지만 속편의 소설 모두가 영화화될 것을 기대했던 저자의 과욕 탓이었는지 후속작은 그다지 반응이 좋지 못했다.

영화제작은 6년이나 미뤄졌는데 그 우여곡절 가운데에는 애초 프롯을 윌 스미스가, 마크 파웰을 케빈 스페이시가 연기하게 되어 있다가 뒤집어진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내심 프롯 역을 탐내던 케빈 스페이시는 윌 스미스가 중도하차하자 그 역을 자청했다고. 케빈 스페이시는 선글라스를 끼고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는 프롯의 컨셉을 만들기 위해 아일랜드 록밴드 U2의 리더 보노의 이미지를 참고했다고 한다. 화제를 모았던 만큼 480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이 영화는 개봉 첫주에만 1750만달러라는 준수한 흥행몰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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