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낯선 영화가 도착했다. <낮은 목소리> 이후 8년 만에 극장 개봉하는 한국 기록영화인데다, 기록 대상이 영화와 아무 인연 없어 뵈던 무속이다.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는 21세기 대중과 전근대 샤머니즘을 화해시키려는 영화판의 굿이다. 과연 화해가 가능할까? 란 의구심이 드는 건 김동리의 <무녀도>부터 최근의 까지가 일러주듯, 근대 기독교에 밀려 소멸해간 무당의 요령 소리가 동네방네 십자가로 도배된 IT 강국에 주술을 걸기엔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가 사기꾼임을 폭로하는 프로가 히트치는 판에, 굿판은 아무래도 <그것이 알고 싶다>의 검증이 필요한 사이비 미신쯤으로 치부된 면이 있다. 따라서 박기복 감독의 집요한 참여관찰이 수놓은 이 드문 민속지(ethnography)를 염탐하려면 근대적으로 학습된 모든 편견을 괄호쳐야 한다. 그러나 이는 귀신영화 볼 때의 호기심 정도로도 특수한 문화를 고생없이 체험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모든 수고는 감독이 다 했으니까. 무당 다큐를 객관화할 지평이 부족한 필자도 오직 이 점에 무임승차하며 ‘설’을 풀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설(私說)은 이 영매와 정신분석을 겹쳐놓듯, 토속적 경험을 서구화된 언어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무속이 갖는 특수성의 한계와 보편성의 가능성이 여기 어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성적 징후로서의 상처
영화가 비추는 무속의 사례는 크게 넷이다. 만선을 기원하는 포항의 풍어제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한판 대동제이다. 얼핏 한복과 몸빼가 뒤섞인 아지매들의 율동이 트로트 반주의 관광버스 댄스를 연상시키지만, 무당의 사설에 눈물 흘리고 점잖은 아저씨들까지 마구 망가지는 도취적 음주가무는 상투적인 유희를 넘어 굿이 일상의 일탈을 주관하는 축제의 주술임을 일러준다. 이 풍어제는 망자와 교섭하는 여타의 굿들과 구별되지만, 진도의 씻김굿처럼 무업을 가업으로 삼는 세습무에 속한다. 이와 달리 신들림의 체험으로 무당이 된 사례가 진도와 인천의 강신무를 통해 보여진다. 진도의 강신무는 도시에 비해 손님이 적은데다 글을 몰라 돈 되는 씻김굿을 못 배운 탓에 농사를 병행하는데, 여기에 보태준 것 없는 남편이 때로 야속하다. 그 원망이 그녀의 몸으로 들어온 어머니의 영혼을 통해 터져나온다. 객사한 손님 아들의 영이 빙의된 인천의 강신무는 아들 어미와 더불어 통곡하며 처절한 복화술을 쏟아낸다. 극적인 빙의 현상은 없지만 세습무의 씻김굿은 무당으로 천대받다가 죽은 언니의 혼을 여든살의 동생이 유장하고 한 많은 ‘소리’로 달래고 풀어준다.
이런 망자천도(亡者天導)를 통한 가족적 상처의 치유가 감독의 포커스지만, 그 상처가 하나같이 여성적 징후기도 하단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남편과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굿을 주문할 뿐 아니라 몸소 넋대를 잡고 접신하다 실성하는 어머니는 한국적 모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진도의 무당들은 도시와 교육에서 소외된 노동과 시집살이의 고통, 세습되는 사회적 멸시를 늙은 시골 무녀의 신분으로 한풀이한다. 여기서 어머니가 치르는 대가는 쉬고 싶어도 영매의 고독과 피로를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무녀의 숙명으로 심화된다. 그렇게 한 주름인 모성과 무녀의 한은 남성중심적 질서의 안녕을 희원하면서도 거기에 희생되는 여성의 유구한 타자성을 다큐 특유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증언한다. 인터뷰를 거부하는 83살 무녀의 주름진 침묵, 예쁜 가수로 환생하고 싶다는 할머니의 표정, 밭일로 일그러진 우락부락한 아낙의 피부, 돼지 피로 범벅된 무녀의 입가는 모두 이 영화를 예술전용관에서 편안하게 보게 될 젊은 도시인들과 가장 거리 먼 타자의 얼굴을 들이민다. 남자 무당은 스쳐지날 뿐인 이 영화는 영매(靈媒)라는 글자 속에 무녀(巫女)가 숨어 있듯, 죽음과 소통하며 삶의 세계를 치유하는, 그러나 그 세계로부터 하대받는 여성의 ‘낮은 목소리’를 자막없인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로 들려준다. 간신히 들려오는 그 변방의 언어는 한글도 한자도 아닌 ‘귀신글’처럼 상징질서 바깥과 교신하는 비언어적 언어, 타자의 언어에 다름 아니다.
애도로서의 영매, 영매로서의 영화
<영매>는 결국 타자적인 죽음을 다루는 영매의 타자성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의 안과 밖으로 나누자면, 무당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영화가 무당을 다루는 방식은 상실을 인정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애도(mourning)로 이해될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애도는(무속에 거칠게 대입하자면), 실재계(죽음의 영역)를 떠도는 유령(귀신)이 상징적으로 의미를 부여받지(원한을 해소하지) 못해서 상징계(삶의 영역)에 구멍을 뚫고 삶을 일그러뜨릴 때, 그 트라우마(상처)를 상징화(치유)함으로써 상징계의 통합성을 재확보하려는 삶의 욕망이다. 이런 애도가 원활하지 못할 때 상실을 부인하고 자기 학대에 빠지는 우울증이 발생한다. 고로 무당은 굿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죽은 자의 의미를 되새겨주면서 저승으로 고이 보내주는 영적 가이드이자, 산 자를 우울증으로부터 지켜내는 심리적 가드이다.
이 애도가 상징적인 건 직접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실재계와의 직접 접촉은 죽음과 다름없기에 돼지와 닭을 제물 삼아 작두를 타며 죽음에 접근할 뿐이다. 그 흉내의 근사치에서 빙의가 일어나지만, 아들의 혼이 영매로 간접화됨으로써 어머니는 안전하게 영매-아들을 껴안는다. 이 강신무의 악기들이 엑스터시를 충동하는 단선적 요란함으로 휘몰아친다면, 세습무는 대대로 학습된 기예를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된 죽음의 판소리를 굽이굽이 변주하며 들려준다. 강신무가 통곡을 통한 육체의 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면, 4·4조의 끝없는 씻김굿 사설은 죽음의 성찰로 느릿한 고양감을 선사하는 쪽이다. 이런 상징화는 비언어적 리듬으로 ‘미지와의 조우’를 실현시킨다. 그리하여 <영매>는 귀신을 믿든 안 믿든 무속의 본질이 죽음에 대한 인간 보편의 태도에 있음을 설득해 보인다. 작두 타기의 테크닉이나 굿의 최면 효과를 따져보려는 과학적 호기심은 이런 보편성을 조금도 위협하지 못한다. 교리와 분파로 정형화되고 왜곡된 특정 종교와 달리, 인간인 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징적으로 애도함으로써 가족의 통합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소박하고도 근본적인 삶의 욕망만을 본다면, 무속은 가장 순수한 종교에 가깝다.
<영매>의 굿이 영화 속의 애도가 갖는 보편성에 주목한다면, 감독의 카메라는 그 보편성을 담아내는 영화 자체의 특수성을 환기시킨다. 근대화 바깥으로 축출된 샤먼의 영령을 탈근대 문턱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소환할 때의 한국적 특수성이 그것이다. 이는 80년대 이래 독립영화 진영의 다큐가 감행했던 근대화 내부의 소외와 모순, 고발과는 궤를 달리한다. 올림픽 당시 모든 매체가 눈감고 있던 상계동 철거촌에 카메라를 들이밀 때는 은폐된 사실의 폭로가 진실인 시대였다. 그 진실은 곧 근대화의 교정과 합리적 완성을 촉구하는 선언이었다. <낮은 목소리>를 거쳐 <밥·꽃·양>에 이르기까지 다큐 패러다임은 여전히 근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근대적 카메라의 유효성과 별개로, 근대의 계몽이 죽여놓은 어둠 속의 유령이 차마 망각의 강을 못 건너고 상징계를 침범할 수도 있다. <영매>는 기나긴 억압 이후 귀환한 한국적 유령의 채무변제 요구에 상응한 상징화인 셈이다. 인천 강신무에겐 홈페이지도 있듯이, 탈근대는 근대 바깥의 타자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줄 역량이 있다. 여기선 사실 자체가 진실이기보다 사후적인 의미 재구성이 진실이다. 이런 탈근대적 징후는 죽지 않고 사라질 뿐 다시 돌아오는 귀신, 즉 유령적인 것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근대의 이면에서 들끓는 목소리
<영매>가 지금 우리에게 발휘하는 진실의 효과라면 유령의 진정성 대신 그 표면만 형식적으로 착취한 근대의 이면에 대한 반성을 꼽을 수 있겠다. 한국 무속은 조상신 숭배와 천수경 낭독, 돈과 태극기, 그리고 그 흔한 ‘가화만사성’ 액자처럼, 유교와 불교, 국가주의와 가족주의가 뒤엉킨 현세중심의 생활종교이다. <무녀도>에서 기독교와 한판 붙으려던 무당은 <영매>에서 “예수 안 믿는데 천당 좌석 있냐?”며 농담할 만큼 ‘똘레랑스’도 늘었다(물론 한국의 기독교도 그만큼 세속적이다). 그런데 이런 현세적 욕망은 무속을 배척한 근대화의 이면에 늘 들끓던 것이었다. 우리는 집안 신수부터 국가중대사까지 점쟁이에게 의탁하기를 그치지 않고, 명절마다 엄청난 체증과 짜증을 지불하고도 오직 상징화의 텅 빈 형식뿐인 차례를 지낸다. 그러나 무속의 본질 대신 얄팍한 처세술의 미혹과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형식적 억압만이 국가적 규모로 세습되는 행태는 반성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영매>는 여전히 지배적인 구습이 아니라, 근대의 전근대성이 껍데기만 취한 채 내다버린 죽음에 대한 신성한 체험과 성찰, 그 유폐된 타자의 목소리를 애도하는 영화이다. 그 목소리는 ‘아무리 애를 쓰고 지워보려 해도’ 들리는 실재계의 비언어지만, 숱한 괴물-유령-귀신영화들에서 상징화되는 상습적 허구이기도 하다. 주류사회가 끝없이 이혼하려 하지만 끝끝내 다시 결혼하려드는 <디 아더스>를 <식스 센스>로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다큐와 극영화는 멀지 않다.
물론 <영매>는 <볼링 포 콜럼바인> 같은 대중적 다큐에 비해 다층성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무속의 조감도 없이 제시되는 소수의 사례가 객관적 진실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교양휴먼다큐의 컨셉이라면, 무당을 따르거나 천대하는 주변인들 인터뷰와 역사문화적 자료도 삽입할 만하다. 사실 자체로 충격적 진실을 던지긴 힘든 소재인 만큼, 간간이 비친 자연의 여백 같은 개방적 재구성이 좀더 입체적이었다면 싶기도 하다. 이런 희망사항은 그러나 척박한 토양을 홀로 견뎌온 감독의 혼신(魂神)에 기댄 것이다. 이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영화가 가장 남루한 현실에서도 가장 영적인 순간을 상징화할 수 있음을 체험한 현대판 영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