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빈둥거렸어요"
“해가 갈수록 외로움을 느끼는 강도가 세져요.” 김성수 감독의 <영어완전정복>이 마지막 촬영을 마친 지난 20일 서울 올림픽 공원, 이나영은 불쑥 말을 꺼냈다. “이전엔 끝나면 울고, 인사하고 막 그랬는데 요즘엔 그런 게 너무 싫어요. 정리하는 말 같은 것도 싫고.”
이 여자, 머리가 더 복잡해졌나보다. 1년여 전 <후아유> 때 만났을 때도 이나영은 ‘나’에 대한 질문이 많은 배우였다.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를 읽었을 때부터인데, 그런 이성적 고지를 하나 넘은 삶을 따라살 수 없는 내 생활과의 갭에 너무 괴로워했어요. 그러다가 남들도 다 그럴텐데 왜 나만 아파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싫고. 이젠 머리속 정리정돈을 하지 않고 다 놓아버리기로 했어요. 말도 횡설수설하고 싶고, 감성적으로 살아보고 싶고.”
사실 이나영은 뭐든지 ‘열심’인 스타일이었다. 마치 “수험생 가방”처럼 영어책·일본어책 공부거리를 잔뜩 싸들고 다니고, 작품을 붙잡으면 분석하고 따지고 공부에 밤새는. “근데 <영어완전정복>은 신기했어요. 이상하게 빈둥거리고 있는 거에요. ‘너 뭐 믿고 그러니’ 되물을 정도로. 근데 촬영장에서 슛 사인이 떨어지면 나도 모르게 영화속 ‘영주’가 돼요.”
이쯤에서 <영어완전정복>의 영주를 만나보자. 대한민국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9급 공무원. 어느날 들른 외국인 때문에 자그마한 소동을 빚은 동사무소에서 ‘소주병 돌리기’로 영어학습 대표로 당첨돼 영어학원에 간 첫날, 뺀질뺀질 틈만 나면 ‘작업’에 들어가는 구두매장 직원 문수(장혁)에게 한눈에 필이 꽂힌다. “감독님도 이렇게 배우들과 캐릭터 놓고 얘기 많이 한 작품이 없었다 할 정도에요. 저랑 얘기하면서 내 생각, 내가 좋아하는 것 그런 게 많이 담겼어요.” 항상 꽂고 다니는 어린왕자의 뺏지, 민망하면 ‘헤~’ 혀를 쑥 빼물거나 ‘흐흐흐~’ 웃는 버릇, 엉뚱하고 눈 큰게 ‘외계인’같다는 묘사까지 양쪽으로 머리를 질끈 매고 안경을 꼈다 뿐이지 영주는 이나영과 닮았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한 부담은 있었죠. 오버하는 건 싫고, 상황으로 웃겨야 하는데. 사실 <후아유>나 <네멋대로 해라>처럼 감정이 중요하고 앞뒤 장면의 감정연결이 중요한 영화는 어떻게든 혼자서도 가능하잖아요. 근데 <영어…>는 다르더라고요. 작품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느껴요. 카메라의 포커스가 나가더라도.”
이나영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자연스런 모습’에 더 자신이 생긴 걸까. “왜 설경구 선배가 인터뷰할때 자기 캐릭터 그대로 드러내며 툭툭 말 던지잖아요. 브래드 피트나 주드 로, 캐머런 디아즈를 좋아하는 게 그들은 ‘망가지더라도’ 확실히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물론 한국에서 힘든 것 알죠. 특히 여배우는 이미지가 중요하잖아요. 불만이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지만.” 생각을 놓기로 했다면서 그의 생각은 더 많아진 것 같다.
스타에게 좀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나영은 칭찬이나 사랑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다. “혼자 외로움을 많이 타서 그런 것 같아요.” 시간만 나면 장애우들을 찾아가는 자원봉사활동도 알려질까봐 웬만하면 말을 꺼내지 않는다. ‘감성적’으로 살고 싶다는데 여전히 그에겐 신비한 이미지가 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공식석상을 즐기지 못하니까 그래요. 전 지금 사는 게 재미있거든요.” 그래도 이 말을 할 땐 확실히 20대다. “지금 전 아주 진실되고 거기에만 빠지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근데 <바람난 가족>을 보니까 너무 서글프더라고. 그런 역은 지금은 못할 것 같아요.”
마지막날, 쉴 새 없이 하늘을 나는 공군 비행기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아기역의 배우 때문에 고생고생 촬영을 마친 <영어완전정복>은 11월5일 개봉한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