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어느 정도 환상을 두르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성큼 들어서는 김래원을 보고, 철없기만 한 <옥탑방 고양이>의 경민을 먼저 발견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편안하게 카메라 앞에 서고, 어느 틈엔가 소파에 주저앉아 과자를 먹고, 강아지처럼 귀여운 눈웃음을 짓는 스물셋 청년. 그러나 환상은 또한 무너지기 쉬운 것이다.
가볍게 떠오르는 그 틈새에서 결코 허술하지 않게 7년을 살아온 어느 배우의 분투를 감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래원은 “단 한번이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많은 걸 배워 어른이 되는 건 싫다”는 어긋난 욕망을 가진 배우다. 그가 들려준 몇 가지 에피소드, 그리고 그에 섞여 있는 자괴감과 자신감의 충돌은, 그 욕망이 다투고 있는 흔적이 아닐까. 이미숙과 임수정과 함께 영화 <…ing>를 촬영 중인 김래원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성실하게 현재의 자신을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다.
scene#1
래원과 그의 친구, 방바닥에 퍼져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래원 | (담배 연기를 훅 뿜으며) 친구야,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아냐?
친구 | 뭔데?
래원 | 그건 바로… 연기야.
친구 | … 많이 컸다.
이 무슨 허무한 문답인가 하겠지만, 김래원은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던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엔 “그저 연기 못하는 게 싫어서 무조건 열심히” 연습했을 뿐이었다. 특별한 목표나 목적도, 자신이 배우라는 자의식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김래원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수줍은 기색을 넉살로 감추면서 자기만의 연기론을 설파하는 배우가 됐다. 얼마 전 그는 그 변화를 몸으로 느낀 적이 있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눈사람>과 <옥탑방 고양이>를 연이어 봤는데, 그 자신이 전혀 다른 두 남자로 보였던 것이다. “지금 <눈사람>을 하면 훨씬 잘할 텐데, 저렇게 딱딱하게 하지 않고 편안하면서도 강한 남자를 연기했을 텐데” 통탄을 하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이 뿌듯하다. 어쩌면 덜 여문 배우의 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교2>의 어두우면서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반항아 한을 연기했던 김래원과 곱게 커서 뻔뻔한 <옥탑방 고양이>의 법대생 경민을 연기한 김래원은, 분명 같은 사람이 아니다. 지금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ing>에서 “유일하게 즐거운” 영재. 경민과 비슷하면서도 다르지만, 그 다른 부분을 포착하지 못해 성질을 부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엄마와 단둘이 사는 외로운 소녀에게 사랑을 주는 영재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지금 그는, 기분이, 아주 괜찮다.
scene#2
모 드라마를 촬영 중인 래원, 뭔가 이상하다
선배 | 어이구, 우리 새끼.(가슴을 쓰다듬듯 때리지만… 은근히 아프다. 반지까지 꼈다)
래원 | (꾹 참는다)
며칠 뒤
선배 | 어이구, 이놈아, 고생이 많았지?(톡톡 두드리는데, 역시 아프다)
래원 | (귀여운 척) 아우, 할머니, 왜 때리고 그래.(와락 밀쳐낸다)
한때 김래원은 성숙하고 과묵한 소년으로 보이기도 했다. <학교2>에 함께 출연한 후배가 처음엔 선생님 역으로 캐스팅된 줄 알았다면서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타고난 좋은 체격과 웃지 않을 때는 조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그랬던 김래원은 여러 배역을 거치면서, 특히 경민을 연기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장에 가면 사람들한테 장난도 치고 말도 곧잘 붙이고 그래요. 그래야 편안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으니까. 가만히 인상 쓰고 있다가 카메라 돌아가기 시작하면 웃는 배우들도 있는데, 너무 신기해.” 김래원은 그것이 자신의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장난처럼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지 않는 강인함”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주변에서 채근해도 서두르지 않는다. 독한 연기자가 되라는 어느 선배의 충고도 멀기만 하다. “아직은 내 나이에 맞는 연기만 하고 싶어요. 귀여운 건 되는데 남자다운 건 안 되거든요. 어떻게 하면 남자답게 반응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간 되겠죠.” 그는 아직 스물셋일 뿐인 것이다.
scene#3
드라마 스탭들과 함께한 술자리, 래원은 이미 취했다.
래원 | (울먹이며) 전 정말 연기 못하겠어요. 기싸움하고, 머리 쓰면서 치밀하게 연기하고, 이런 거 정말 안 돼요. 연기 그만 할까봐요.
카메라 감독 | 네가 연기 안 하면 누가 연기를 하겠냐!
래원 | …(헤벌쭉)
김래원은 기타노 다케시를 좋아한다. <기쿠지로의 여름> 메이킹필름을 봤을 때, 그는 어린 배우에게 연기를 가르치면서 “남의 상처를 보고 그렇게 웃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기타노에게 감동을 받았다. 순수함, 아무리 세상에 부대끼더라도, 본심을 잃지 않는 순수함. 김래원은 그런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만 사람을 움직이는 진실한 연기가 나온다고 믿는다. 배우의 영악한 발언이라고 보기에는, 이말 저말 던지는 태도나 표정이 너무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던 김래원. 그는 “사랑이 진행 중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준 그의 영화 <…ing>처럼, 아직도 뭔가가 진행 중인 배우다. 그 끝이 궁금하지만, 너무 빨리 결말을 보고 싶지도 않은, 재미있는 영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