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진은 연기와 실제를 구분하기 힘든 배우다. 그가 연기를 실제같이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연기하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럴듯한 가장(假裝)과 거리가 먼 그는 아직 완전한 페르소나를 갖추지 못한 초짜거나 그 스스로가 메타포로 기능하는 메소드 배우 둘 중 하나다. 특이하게도 김남진은 그 둘 모두에 속한다(후자는 이제 막 씨의 형태가 보일 뿐이지만). 이제 두편의 영화(그중 하나인 <연애소설>은 2회 출연에 그친다)에 출연했고, 스크린보다는 브라운관에서 아니 그 이전 한장의 사진을 통해 번드르르한 몸을 먼저 알린 그는 ‘연기자’로 불리게 된 몇편의 연속극에서 순진하거나 혹은 야비한 표정으로 줄곧 더듬거렸다. 귀티나는 외모가 본디 순수혈통 강남 귀족을 떠올리게 하지만 줄곧 제주도 섬 청년이었던 그가 어떻게 소리없이 도심의 간판을 접수했으며, 무엇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김남진을 호출하게 하는 힘인지를, 수식없이 체험을 연기로 꿰뚫어내는 그만의 직설화법을 통해 짐작해본다.
“나카타 상은 몸에서 힘을 빼고 머리의 스위치를 끄고 존재를 일종의 통전(通電) 상태로 만들었다. 그에게 통전 상태란 극히 자연스런 행위이며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생각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해온 일이었다. 얼마 뒤 그는 의식 주변의 가장자리를, 나비처럼 흔들흔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장자리 너머에는 어두운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이따금 가장자리를 벗어나 그 아찔한 심연 위를 날았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어둠이나 깊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중
얼마 전 그는 친구로부터 하루키의 신작을 선물받았다. 그러나 소설에 등장하는 ‘나카타 상’이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물을 받고 책장을 열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끔씩 찾아오는 ‘통전 상태’를 그는 ‘바보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지친 뇌를 쉬게 하는 건데, 생각을 머리 속에서 싹 지우는 거예요. 자는 건 아니고, 그냥 눈을 뜬 채로, 멍∼하니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있어요.” 그의 뇌가 혹사당하는 시간이란, 사람을 관찰할 때다. 관찰 역시 그의 오랜 습관 중 하나다. 서귀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집에 이르는 밀감밭 둑길을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이곤, 홀로 된 느낌을 은밀히 즐기며 자연을 관찰하던 습관은 군대에 들어가 주변 사람에게로 옮겨졌고, 지금도 연기자들 틈에 끼여 있을 땐 조용히 예민한 더듬이를 안테나처럼 펼친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은 종이에 끼적거리기도 하지만, 입을 열어 상대에게 감상을 피력하는 법은 대체로 드물다.
말보단 느낌으로, 동영상보단 짤막짤막한 이미지들로 대상을 기억하는 습관은 사진 모델로 활동하면서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0.001초의 빛이 터지는 순간, 제 느낌과 감정이 그대로 저장되는 거잖아요. 전 오래 생각하고 차분히 느낌을 정리하기보다는 사진을 찍듯이 그 당시의 감정을 낱장씩 찍어두는 편이죠. 해석이나 주를 달지는 않아요.”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연기에 몰입하는 순간에도 여지없이 작동한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를 찍을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긴 영화를 통틀어 한 가지 느낌으로, 한 가지 이미지로, 한 호흡으로 가자고 했어요.” 한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 느낌이란, ‘상대를 향한 일직선적인 관심’이자 ‘그녀에게로만 쏠리는 시선’이고, ‘내 몸이 그녀에게 강하게 반응하는 상태’라고. 극중 현채를 바라보는 기관사 동하의 모습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지금 내 눈엔 너만 보여’라고 할까.
그렇지만 그에게 겨우 세 번째 연기 도전이었을 뿐이다. <천년지애>조차도 <봄날…> 이후에 찍은 작품이었다. 그나마 연기 경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 TV 베스트극장 가 다였다. 가장 심각한 건 대사 전달력이었다.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금세 발음이 꼬이거나 새버려요. 그땐 웅얼거림이 더 심해서 지적도 많이 받고 덕분에 스트레스도 많았어요. 지금은 저부터 그걸 편하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언젠가 보시는 분들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하고.” (웃음) 그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연극배우 신용욱의 경우도 ‘감정이 먼저 대사는 나중’임을 강조한다. 최근 촬영 중인 <회전목마>의 경우, 8회차를 넘기면서 그는 어느 정도 감정의 선을 잡은 것 같아 발음에 신경 쓸 여유도 절로 생겼단다. 유난히 똑똑하게 그의 대사가 들리는 까닭은 선명한 집중도와 자신감에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서면 평소엔 전혀 하지 않는 행동들을 척척 하게 되고,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레 느껴지는 게 그로선 신기하다. “제 안에 변신과 탈출에 대한 욕구가 생각보다 강한가봐요.”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미치도록 제주도를 벗어나고픈 섬 소년이었다. 서울을 동경하기보단 탈출을 동경했고, 대학을 핑계로 낯선 도시에 발을 디뎠을 때를 잊을 수 없다. 키는 훌쩍했지만, 덩치도 산처럼 컸던 음대 피아노학과 1학년, 모질게 30kg을 감량하고 연기학원에 등록할 땐 변신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때를 기다려 자신에 유리한 쪽으로 행보를 정하는 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행운아가 아닐 수 없다. 단지 벗어나고 싶어 서울로 향했고, 변신하고자 피아노를 등지고 연기를 택했는데, 그를 모르는 또래가 없다는 건 확실히 샘나고 부러운 일이다.
병장 시절, 세운 3개년 계획이 올해로 만기를 맞는다는 그는, ‘1년간 열심히 놀 것, 1년간 연기연습 할 것, 1년간 연습한 결과를 가시화할 것’이라는 세 가지 계획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놀라워하는 중이다. 새로운 3개년 계획이야 아직 구상 중이라지만, 여러모로 ‘변신’과 ‘탈출’에 그 기저를 두지 않을까 쉬이 짐작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