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평이한 대중영화의 깔끔한 멜로,<냉정과 열정 사이>
2003-10-07
글 : 김의찬 (영화평론가)
■ Story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회화 복원사로 일하는 준세이(더케노우치 유타카)는 평생 잊지 못할 여인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녀의 이름은 아오이(진혜림). 준세이는 아오이와 한, 30살의 생일날 피렌체의 성당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아오이의 소식이 준세이에게 전해진다. 아오이가 살고 있다는 밀라노로 달려가는 준세이. 이미 그녀 곁에는 다른 남자가 있다. 다시 일터로 돌아온 준세이는 자신이 복원하던 그림이 누군가에 의해 찢겨 있는 것을 발견한다. 스튜디오마저 문을 닫게 되고, 준세이는 도쿄로 돌아온다.

준세이는 아오이와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보지만, 장소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 무렵 친구로부터 아오이가 자신을 떠나게 된 비밀을 알게 된 뒤 준세이는 밀라노에 있는 그녀에게 편지를 띄운다. 답장을 기다리던 어느 날 피렌체의 스튜디오로부터 연락이 오고, 준세이는 피렌체로 온다. 드디어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날, 준세이는 10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렌체의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Review

일본어 단어 중엔 ‘훈이키’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는 분위기를 뜻한다. 분위기 좋은 사람, 분위기 좋은 장소를 칭할 때 쓰이곤 한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분위기 있는 영화라고.

<냉정과 열정 사이>는 에쿠니 가오리, 쓰지 히토나리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 저자들은 평소 서로에게 호감과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찻집에서 만나 우연하게도 소설연재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 결실이 <냉정과 열정 사이>란다. 소설을 읽은 독자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Blu>와 <Rosso>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에 대해서. 사랑과 고독 사이의 엄청난 위화감에 대해서. 원작자들은 준세이와 아오이라는 인물 시점을 각기 다른 글을 통해서 소설로 써내려갔고 이것이 두권의 소설로 출판되었다. 원작소설은 이별한 커플 준세이와 아오이의 일상을 그리고 있으되, 이들이 얼마나 과거에 얽매어 있는지 절절하게 보여주었다. 현재를 살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옛 시간으로 거슬러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10년 뒤의 재회’라는 거짓말 같은 약속을 믿는 커플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각색의 힘에 기댄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원작처럼 각각의 인물 시점에서 서사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주인공 중에서 준세이에게 호감을 보인다. 중세 회화 복원사로 일하면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으려는 인물. 자신의 태생을 부끄러워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한 여인을 가슴속 어딘가 꼭꼭 숨겨놓은 신비스런 남자. 주로 TV드라마를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과시했던 배우 다케노우치 유타카가 준세이를 연기했고 아오이는 홍콩영화 <무간도>에 출연했던 진혜림이 연기했다. 원작소설에 비해 남녀의 사연은 더 구체적인 기운을 띤다. 결말도 명확하다. <잠자는 숲> 등의 TV드라마를 만든 나카에 이사무 감독, <여동생이야> 등의 각본을 썼던 미즈하시 후미에의 솜씨다. 이들은 대중영화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 영화가 시각매체이며 에피소드가 분명하고 해피엔딩일 경우, 대중영화로서 손색없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나카에 이사무-미즈하시 후미에 팀은 소설을 읽은 독자, 그렇지 않은 관객 사이에 공감의 다리를 놓는다. 배우 다케노우치 유타카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지는 준세이의 ‘편지’가 영화에서 얼마나 깊은 울림을 지니는지 살펴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로케이션의 영화다. 이탈리아와 일본 등에서 촬영되었고 특히 피렌체와 밀라노의 풍광이 아름답다. 미술관과 성당, 수도원 등을 배경으로 영화는 이탈리아의 문화유산을 영화의 든든한 후원자로 거느리고 있다. 오래전 약속을 잊지 않은 준세이와 아오이 커플이 만남을 갖는 것이 영화의 절정부. 영화에서 둘은 피렌체의 대성당에서 재회하게 된다. 밀라노의 대성당에 비해 정겨우면서 화사한 느낌이 도는 피렌체의 대성당은, 연인들의 재결합을 장식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 된다. 이것은 문자로나마 막연하게 재회의 순간을 상상했던 독자라면 특별한 순간이 될 법하다.

“솔직히 말해서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믿는 것은 무모한 일, 만용(蠻勇)입니다.” 원작자 에쿠니 가오리가 언젠가 했던 이야기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만용의 기록이다. 아오이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남자를 떠나 옛사랑의 기억에 잠겨든다. 준세이 역시 어느 여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아오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렌체로 달려간다. 누가 봐도 정상적이고 평온한 행적은 아니다. 모래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사랑의 기억, 희미하게 간직한 과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녀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 미친 사랑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꿈꾸거나 꿈꾸었던 것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평이한 대중영화지만 깔끔한 멜로영화로서 제구실을 한다. 돋보이는 스타와 로케이션, 인기있는 원작. 더이상 훌륭한 선택은 불가능할 것 같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풍경의 영화가 갖는 호소력을 인정한다면 <냉정과 열정 사이>는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

:: 영화음악

영원히 사랑하게 하소서

<냉정과 열정 사이>는 O.S.T가 두 가지다. 하나는 엔야가 만든 테마음악집. 엔야는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음악인으로 뉴에이지와 팝을 접목한 곡들로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위해 그녀는 이전 곡들과 신곡을 골고루 섞어 하나의 음반을 만들었다. <Wild Child>와 <Watermark> 등은 이전 엔야의 곡을 다시 사용한 것이며 신곡 2곡이 포함되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엔야의 음악은 준세이와 아오이의 테마곡처럼 인상적으로 쓰였다. 영화는 이탈리아에서 많은 장면이 촬영되었으며 회화 복원이나 보석가게 등 고풍스러우면서 귀족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게 사실. 엔야의 편안하면서 일견 고전적인 뉘앙스를 지닌 음악들은 <냉정과 열정 사이>가 멜로영화로서 품격을 갖도록 한다. 영화 엔딩곡으로 쓰인 <Wild Child>는 귀기울일 만하다.

<냉정과 열정 사이> O.S.T의 또 하나의 버전은 연주곡집. 요시마타 료가 제작한 음반이다. 여기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17곡의 테마곡이 실려 있다. 오케스트라 테마곡집이라고 하면 그저 가벼운 배경음악이나 효과음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냉정과 열정 사이> 오케스트라 O.S.T 버전은 가벼운 피아노곡에서 웅장한 관현악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싣고 있다. <History> 등에선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들었던 몇 가지 영화음악이 연상되기도 한다. 요시마타 료는 비교적 짧고 간결한 선율의 음악으로 영화를 장식하고 있으며 편곡의 묘미를 살린 오케스트라 연주를 끌어냈다. 엔니오 모리코네, <러브레터>의 음악을 만든 리미디오스, 그리고 가브리엘 야레와 존 베리의 그림자를 감지할 수 있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오케스트라 O.S.T는 낭만적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두장의 O.S.T 모두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탐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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