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감독 박명천은 이진숙 프로듀서를 “타란티노 같은 여자”라고 소개한다.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화를 배운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이진숙 PD도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다가 제작에 발을 들여놓게 된 탓이다. 한때는 영화마을 종로점 주인, 지금은 독립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마당발 프로듀서. 이진숙 PD는 “정말 무모하게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처음으로 뛰어들었고, 디지털 장편영화 <뽀삐>와 <테스트>, 11월22일 개봉하는 옴니버스 인권영화 <여섯개의 시선>으로 경력을 채워나가고 있다. 특히 <여섯개의 시선>은 박광수와 박진표, 박찬욱, 여균동, 임순례, 정재은 감독이 각각 단편 하나씩을 연출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여섯배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영화. <여섯개의 시선> 개봉과 해외배급을 준비하면서 신작의 프리 프로덕션까지 진행하고 있는 이진숙 PD를 새로 입주한 논현동의 모던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여섯개의 시선>이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하게 됐다. 뿌듯하겠다. 영화 다 만들었으면 극장에서 개봉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뭘. (웃음) <여섯개의 시선>은 처음부터 전주영화제 개막작 선정과 봄 극장개봉을 목표로 삼았던 영화였다. 주변에선 개봉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감독들마저 나를 놀리곤 했다. 박광수 감독은 “전주영화제 개막작은 재미있는 영화로 정할 텐데, 우리 영화가 되겠느냐”고까지 말했다. (웃음) 다행히 배급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가 정재은 감독에게 <여섯개의 시선>이 잘 되어가는지 물어봤다더라. 최 대표를 기술 시사에 초대했고, 배급과 마케팅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청어람 배급 스케줄에 맞추다보니 11월에야 개봉하게 되긴 했지만. <여섯개의 시선>을 제작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제작비 5천만원을 지원했을 뿐 배급과 마케팅 예산을 전혀 책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에 빠질 뻔했다. 무엇보다도 인권영화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과는 달리 영화가 재미있어서 마음이 좋다. 후쿠오카인권센터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는 영화를 만들어도 사람들이 인권을 멀리하게 하는 역효과만 낳는다고 하더라. (웃음) <여섯개의 시선>은 재미도 있고 주제도 좋다고 부러워들 했다.
인권위 같은 국가기관과 일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감독도 여섯명이나 돼서 여러모로 힘들었을 텐데. 국가의 법이라는 게 참 그렇더라. 한번 돈을 받을 때마다 관련 서류를 열장은 준비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이건 영화가 여섯편 아닌가. 똑같은 서류를 여섯번씩 만들다보니, 인권영화 프로듀서인데 내 인권만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웃음) 거기에 비하면 감독들과 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도 바쁜 사람들이어서 여섯명이 한자리에 모인 게 얼마 전 포스터 촬영할 때가 처음이긴 했지만. 가장 고생한 건 계약서 쓸 때. 제작기한을 어기면 위약금을 내야 한다는 식으로 조항이 무시무시하다보니 감독들이 질색을 했다. 12월31일까지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데, 10월이 다 가도록 계약서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여균동 감독이 돌파구를 줬다. 네가 돈 주는 사람 입장이 돼서 일하라고. 그렇게 입장을 바꾸고나니 일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지금까지 항상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일을 배워왔다.
섭외과정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거다. 이창동이나 허진호 감독처럼 물망에 올랐다가 빠진 감독들도 있었고. 인권위가 처음에 프로젝트를 건넨 사람은 박광수 감독이었다. 박광수 감독 연출부 출신으로 입봉한 감독들이 많았으니까. 거기에 이현승 감독이 합류해서 두 사람이 의논을 하다가, 이 정도 규모면 프로듀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나를 부른 거다. 사실 이현승 감독은 공동프로듀서나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워낙 발이 넓으니까, 이현승 감독이 먼저 전화를 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면, 내가 다시 전화하거나 찾아가는 식으로 일을 해나갔다. 인권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고, 최근까지 작품을 만든 사람이어야 하며, 연령과 성별을 골고루 배치할 것. 이 정도가 선정기준이었다. 원래 이현승 감독도 영화 한편을 연출할 생각이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소재를 선택하려고 했는데, 인권위와 문제가 많은 것을 알고 몸으로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연출을 맡은 감독들은 다들 선뜻 응낙해줬고, 사비까지 털어가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다룬 박찬욱 감독은 주인공의 고향인 네팔까지 가느라 사비 1천만원 정도를 더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이진숙 PD도 꽤 폭넓은 인맥을 유지하고 있다. 친분있는 영화인들 중에는 비디오 가게 고객이었던 사람이 상당수 있다던데. 누가 그러더라. 영화계에는 영화마을 종로점 고객이었던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다고. 지금도 촬영현장에 나가면 “사실은 제가 아직 연체료를 안 냈는데요” 하면서 고백해오는 스탭들도 있다. (웃음) 예전에는 비디오 가게 주인이라면 아저씨나 아줌마를 떠올렸는데, 20대 여자가 가게를 하고 있으니 신기하게들 봤던 것 같다. 영화도 좀 아는 것 같고. 그렇게 말을 트다보니 영화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다. 박찬욱이나 임필성 감독과는 세 사람이 모두 좋아하는 B급영화에 관한 정보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아마 그 무렵엔 우리 셋이 한국에서 영화 제일 많이 보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허진호 감독, 명필름 이은 대표, 문승욱 감독도 우리 가게에 드나들던 손님이고, 영화사에서도 많이들 찾아왔다. <씨네21> 기자들도 우리 가게 테이프 빌려갔다가 많이 잃어버렸는데. (웃음) 망하는 비디오 가게 찾아다니고 청계천도 뒤지면서 테이프를 확보했다. 그때는 그냥 좋은 영화 보는 일이 너무 좋아서, 왜 어렵게 영화를 만드나 싶었다.
그러다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프로듀서를 하게 됐다. 원래 영화와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작을 해야겠다는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젊었을 땐 사회운동단체 간사로 일했다. 그런 일이라는 게 사람 뒤치다꺼리가 대부분이다보니, 지치기도 하고 회의도 생겼다. 그래서 다 그만두고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 하던 동생 시켜서 날마다 비디오만 빌려보며 지냈다. 하루에 다섯편씩. 그러다가 영화를 좋아하게 됐고, 비디오 가게 주인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가게를 열었다. 영화마을 창립 멤버 중 한명이 된 것도 비슷했다. 영화마을은 꽤 성공한 중소기업이었고, 단편영화 한편에 제작비 500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만난 영화가 류승완 감독의 <패싸움>이었다. 처음엔 한편만 지원하려고 했지만, 그게 4부작 옴니버스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보니, 비디오 시장에선 꽤 괜찮게 먹힐 것 같았다. 참 무모하게, 생각없이 시작했지? (웃음) 원래 계획 세우고 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구미에 당기는 일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영화제작은 매우 복잡한 과정인데, 실수도 많았을 것 같다. 지난 일을 담아두지 않는 성격이라 잘 기억 안 나는데. (웃음) <뽀삐>에 흑백으로 과거장면을 찍은 부분이 있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처럼 흑백필름으로 찍어서 현상을 하려는데, 그 사이에 흑백현상하는 곳이 모두 없어졌던 거다. 할 수 없이 고작 몇자 현상하자고 필름을 일본까지 보내야 했다. 사실 영화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훈련도 안 된 개 데리고 영화 찍을 생각을 아예 안 했겠지. 영화에 나온 뽀삐는 지금 내가 키우는데, 조련이 불가능한 개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개라는 뜻이다. 다행히 뽀삐가 나를 좋아해서, 걷는 장면 찍고 싶으면 내가 멀찌감치 서서 뽀삐야 하고 부르곤 했다. 영화라는 게 무척 큰 일이지만, 이렇게 작은 데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큰 부분까지 망가지는 거다. 처음엔 겁먹기도 했지만, 프로듀서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잘 엮으면 된다고 마음먹기로 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자존심 따지지 않고 물어봤다. 내가 워낙 저자세로 사는 인생이니까. (웃음) 몇년 동안 제작을 했는데 이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
지금까지 제작한 영화들이 대부분 독립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류다. 이쪽만을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영진위 김혜준 국장은 프로듀서계의 김기덕이라고 놀리지만(웃음) 독립영화만 고집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마음 끌리는 영화를 할 뿐이다. 지금 회사가 하나 있다. <뽀삐>가 영진위 디지털영화배급지원을 받을 때 회사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서류만으로 하나 만들었는데, 이름이 앤젤 언더그라운드다. 번역하자면 ‘비주류 천사’쯤 될까. 천성이 비주류를 좋아해서, 계속 인디펜던트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다. 감독들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는 천사 역할을 하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다음 영화는 LJ필름에서 만드는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이다.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꽃미남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영화인데, 올해 부산영화제 PPP에 출품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정재은 감독과는 십년지기 친구다. 그동안 우정만 나눴지만, <여섯개의 시선>을 할 때는 감독과 프로듀서로서의 호흡도 잘 맞았다.
제작사와 함께 일하는 건 처음이다. 자신의 회사도 생겼고, 지금까지와는 일하고 사는 방식이 달라질 것 같다. 지금까진 제작한 영화가 꼭 수익을 내야만 한다거나, 이게 망하면 다음 영화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럴 영화들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이상한 영화 그만 만들어라, 돈 되는 영화 좀 해라, 이런 소리보단 영화 잘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러면 긴장하고 불안해질 텐데, 그런 살얼음 밟는 삶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에 영화 몇편을 수입해본 적이 있는데, 개봉 전날만 되면 너무 초조해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었다. 상업영화를 제작하면 더 죽고 싶어질 텐데. 그래도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꿈은 다들 좋은 영화 만드는 게 아닐까? 선배 PD들도 처음엔 불안했겠지만, 여러 차례 겪다보니 강심장이 돼가는 것 같았다. 난 워낙 스트레스 안 받는 성격이니까 어떻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