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무덥지만 마음속에 이미 여름이 끝나버린 지금, 변변히 휴가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떠올려 보는 ‘내 인생의 영화’라니…. 이 얼마나 고독한 풍경이란 말이냐!
돌이켜보니 영화라는 존재가 로맨틱한 무엇으로 자리잡은 때는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고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불어반에 가입했던 나는 프랑스 문화에 대해 각자 조사하고 발표하는 시간에 ‘프랑스의 주요한 영화사조: 누벨바그’를 소개했다. 당시 나의 유일한 영화교과서였던 <스크린>과 <로드쇼>에서 베껴쓰고 오려붙여 만든 B4 크기의 발표지를 복사해서 나눠주고 발표 간간이 라디오에서 녹음한 영화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 열의와 선진 영화문화에 대한 혜안(!)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졸음 가득한 눈초리를 떠올리면 아마도 ‘지루한’ 프랑스영화에 대한 선입견만 길러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마저 인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 <귀여운 여도적>이나 <까미유 끌로델>이 ‘'누벨바그’인 줄 알고 잔뜩 폼을 잡고 친구들에게 박식함을 떠들던 나에게 사실, 시시해 보이던 대중영화에 대한 부끄러움 모르는 사랑을 ‘커밍아웃’한 것은 그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지금에야 쿨하다는 말이 흔하디 흔해졌지만 정확히 10년 전 나온 <트루 로맨스>, 이 영화는 쿨하다는 것이 시원하거나 냉정하다고 뜻풀이되는 시대를 지나 젊은이들의 대표 형용사가 될 것의 전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타란티노가 지금처럼 세계 영화계의 작가로 우뚝 서기 한참 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B급 쿵후영화와 홍콩누아르, 펄프코믹스에 빠져 자신의 영화 밑천을 흡수하던 무렵 쓴 시나리오라서 그런지 이 영화에는 토니 스콧의 감각적인 영상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 나도 언젠가 한방 하겠어 하는 결기가 그 어떤 영화보다도 짙게 묻어 있다.
로맨스하고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지금은 의 에미넴이 혹독한 성장의 한철을 보낸 도시로 기억되는 곳, 디트로이트에서 클레어렌스와 앨라배마는 만난다. 지금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데다 더 나아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라치면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그런 내가 유일하게 견디는, 아니 즐기는 로맨스가 바로 이 영화에 있다. 그리고 <트루 로맨스>를 내 인생의 영화로 만들어준 결정적 장면이 있었으니 지금도 보고 또 봐도 쿨함의 정수이자 고갱이이다. 클레어렌스는 얼떨결에 집어온 마약을 할리우드의 제작자에게 팔려고 그의 호텔방으로 간다. 이 건만 해결하면 곧바로 뜨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헛바람을 잡는 클레어렌스를 바라보며 철딱서니없이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던 앨라배마가 느닷없이 내미는 냅킨에 적혀진 ‘You’re so cool!’ . 굳이 해석해보면 ‘니가 짱이야’ 정도로 풀이될 테지만 언젠가 나도 내 마음에 로맨스를 불러일으켰던 ‘그때 그 사람’이 자리를 뜬 틈에 냅킨에다 ‘You’re so cool!’이라고 써서 건넬까 말까 했던 낯뜨거운 기억이 있다. 끝내 줬는지 아닌지 지금 와서는 생각도 나지 않지만 분명 기억나는 건 앨라배마처럼 거기에 하트까지 그려넣는 용기는 없었다는 것. 그뒤로도 한참 동안 ‘정은임의 영화음악’ 오프닝 시그널을 들을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이제는 동시대인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정은임 아나운서의 카랑한 오프닝 멘트와 한스 짐머의 <트루 로맨스> 1번 트랙 <You’re So Cool>의 맑은 선율은 심야의 정취에 말랑말랑해진 내 가슴에 현실에는 다시 없을 수도 있는 로맨스를 심어놓았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건대 그들의 로맨스가 쿨했던 것은 맹목적이고 유치찬란하기까지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너무나 진지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낯뜨겁고 쿨하지 않다 말할지 몰라도 고백하건대 로맨스는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라고 믿고 나 오늘도 일생일대의 로맨스, 안 되면 일생일대의 영화라도 애타게 기다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