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자동차 없는 황홀한 `로드무비`,<토끼 울타리>
2003-10-15
글 : 박은영
■ Story

1931년 영국 정부는 호주 원주민법에 의해 혼혈아의 분리 수용을 추진하고 있다. 지가롱 지역의 혼혈 소녀 몰리도 예외일 수 없다. 몰리와 그 동생들은 원주민에게 백인 문화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믿는 네빌(케네스 브래너)에 의해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보호소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몰리는 동생들을 데리고 보호소를 탈출해, 토끼 울타리를 따라 수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 Review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되는 <토끼 울타리>는 기이하게도 보는 내내 ‘신화’나 ‘전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혼을 가진 새가 널 항상 지켜줄 거라던 엄마의 예언, 그리고 들이닥친 생이별의 시련과 고통. 단순히 ‘엄마 찾아 삼만리’로 시작된 소녀의 도주는, 그의 무사귀가를 기원하는 원주민들의 희망이 실리면서, 오만한 백인 이주민에 대한 항거라는 희대의 ‘사건’이 된다.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1500마일의 대장정을 떠난 소녀는, 강인하고 영민한 영웅에 다름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결정권한을 박탈당한 유색 원주민들의 기막힌 운명을 대변하는 소녀의 여정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호주의 원초적인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져, 비통한 신화처럼 처연한 전설처럼 다가온다.

<토끼 울타리>는 영국 정부에 의해 격리수용되고 백인 문명에 길들여진 뒤 하녀나 농장 일꾼으로 고용됐던 호주의 혼혈아들, 이른바 유린당한 세대(The Lost Generation)의 존재를,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 몰리의 딸 도리스 필킹톤이 집필한 전기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영화 처음과 끝에 자막과 내레이션이 흐르지만, 그조차 어떤 강요나 과잉이 없다. 할리우드로 건너가 <긴급명령> <패트리어트 게임> <본 콜렉터> 등 고만고만한 액션스릴러를 만들었던 필립 노이스는 이 작품으로 십수년 만에 고국 호주로 돌아가더니 그간 잊고 지냈던 초심까지 회복한 듯 보인다(그는 호주에서 활동하던 당시 이미 원주민에 대한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건 바로 스펙터클의 영화가 아닌, 사람의 영화를 만들리라는 다짐이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는 원주민 소녀들은 최면에 걸린 듯 역할 속에 빠져 있으며, 케네스 브래너는 그릇된 신념에 휘둘리는 원주민 관리 책임자 역할을 단순 ‘악역’으로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신이 주신 그대로의 자연”을 배경으로 “자동차 없는 로드무비”를 황홀하게 잡아낸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 또한 더없이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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