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인
배우 김선아에겐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인터뷰 당일날 아침까지 촬영현장에 있다 오느라 잠은커녕 화장할 시간도 없었다는 사람이 두뺨에 예쁜 생기만 얹고 있다. 머리를 질끈 동여맨 이 키 큰 여배우가 대뜸 묻는다. “<황산벌> 보셨어요?” 이 질문은 분명 <위대한 유산>과 엇비슷한 개봉일을 염두에 두고 업계 동태 파악용으로 물은 것이리라. “저 이상하게 나오지 않았어요?” 그제야 생각났다. 김선아가 계백 장군의 아내로 출연했던 사실. 덜그럭대는 갑옷소리 틈으로 새나왔던 젊은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 우직한 계백 장군이 최후가 될지도 모를 결전을 앞두고 처자식 눈앞에서 독하게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더 독한 쪽은 그의 부인이었다. 야속한 칼날 끝 살벌한 바람을 콧방귀 한방으로 날려버리고 악에 받친 여인네가 곧은 소릴 내지른다. 죽일 테면 죽여보랑께! 니가 뭔데 내 자식을 죽이네 마네 하는 것이여!
# 첫인상의 현관 김선아의 얼굴에선 가파르지 않게 갸름한 턱선과 윤기어린 짱구 이마가 인상적이었다. <예스터데이>와 <몽정기>를 떠올리면 쉽겠지만 사실 씩씩하고 코믹한 김선아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단 몇편의 CF에서 짧은 시간 극대화되었다고 봐야 옳다. 물론 본인 성격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김선아는 이른바 ‘예쁜 척’을 굉장히 꺼린다. <몽정기> 때도 촬영 내내 걱정스러웠던 건 “내가 지금 너무 예쁜 척하는 게 아닌가, 너무 예뻐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닌가”였다고 한다. 세련된 의상에 걸맞게 고운 분칠과 머리단장까지 하고 나서도 그는 틈만 나면 장난을 치려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고단수의 예쁜 척’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주목받는 것도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이번 영화(<위대한 유산>)도 사실 코미디를 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상황은 되게 사실적이거든요. 너무 리얼하고 진지하다보니까 오히려 재미있어지는 거죠. 트레일러에 나왔던 웃긴 표정들은- 사실 저도 왜 그런 표정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하다보니까 그런 표정이 나온 건데, 보신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너 평소 표정 그대로 나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해요. <몽정기>에서 ‘유리’는 되게 얌전하고 예뻐 보이려는 역할이잖아요. 근데 그때도 평소의 나 같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도 그런 얘길 듣고… 그래서 저도 제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전 사람이 가장 편해 보일 때가 가장 예뻐 보일 때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영화가 저에게 정말 좋았던 이유도 제가 예뻐 보이려고 노력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 환한 테라스 김선아가 <위대한 유산>에 출연하고 싶어했었다는 건 이미 공개된 얘기다. 캐스팅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선아는 러닝머신 위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고백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선택이 맞았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미친 듯이 조르고 쫓아다녔던 게 틀리지 않았다”는 느낌. “평생 동안 몇번 찾아오지 않을 지독한 바람” 중에 하나를 이룬 것이다. 오상훈 감독은 작품에 들어가기 전 김선아에게 “이번에 너의 유작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번 영화가 그의 “대표작”이 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과감한 표현에 대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기자가 대꾸할 말은 없었지만 김선아는 “자만일지 몰라도”란 전제를 반복하며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임창정씨랑 호흡이 너무 잘 맞았어요. 사실 긴장 많이 하고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람 여우다, 연기 너무 잘한다, 여차하면 네가 밀릴 거다. 그런데 막상 같이 해보니까 날 풀어주려고 애쓰더라고요. 그런 게 오히려 프로다운 거겠죠. 연기에 대해서 충고도 많이 해주었는데, 처음엔 그게 그냥 인사치레려니 했거든요. 그런데 끝까지 가더라고요.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 유산(遺産)이 놓인 거실 여름 내내 그는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의 두 촬영장을 분주히 오갔다. 육체적인 피로는 당연했다. “그래도 두 캐릭터의 대비가 확실하니까 저로선 다행이었죠. 연기하기가 훨씬 수월했거든요. <위대한 유산>의 미영이는 욕심도 있고 야무지고 적극적이에요. 남들한테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하고.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의 민경이는 낭만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소녀 같은 여자고, 소극적이에요. 한마디로 (탁자 위에 있던) 이 휴지박스를 칠 때 민경이가 손가락 하나로 이렇게 툭 건드린다면 미영이는 이 손으로 그냥 팍 쳐버리는 거예요.” 2년간 세편, 정확히는 네편의 영화를 해오면서 김선아는 빠르게 스타덤 자리를 얻었다. 두 현장을 동시에 오갔다는 것이 단적인 증거자료일 것이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기분좋게 부풀어 있는 심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예전엔 만날 퇴짜맞았던 내가…. 그땐 혀가 짧아서 발음도 안 되고 국어도 못한다고 말이 많았거든요. 우리 감독님도 처음에 저 캐스팅할 때 그것 때문에 반대하셨대요. 그런데 이렇게 잘됐으니까 감사해요. 그 다음에 뭘 할지 고민할 수 있는 이 시기가 행복한 것 같아요.”
체크아웃
김선아는 쉽게 눌리지 않는 쾌활함과 밝음으로 사는 사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도 그 한면에 모든 조명이 집중돼왔다. 본인도 “지금 같은 연기가 내가 가장 편할 수 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요즘 많이 행복하다니, 재뿌리는 독촉은 삼가야 할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가 언제까지고 CF의 코믹한 ‘피자걸’에만 머물 거란 생각은 접어두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세계적인 골퍼라고 하는 타이거 우즈한테도 선생님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꾸준히 배워야 하는 것 같다”는 믿음을 성실하게 지킨다면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기다림도 좀더 짧아지려나. 카메라 앞에서 정신없이 장난기를 휘두르던 그가 어느 순간 반항기 짙은 소년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때, 지금껏 보지 못했던 김선아의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