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혜림은 다케노우치 유타카를 “무척 추운 날, 자기도 추웠을 텐데, 조그만 스토브를 밀어준 남자”로 기억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찍고 있던 두 배우가 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날의 일이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와 그를 연기한 배우 다케노우치가 인연으로 묶여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런 따스한 면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케노우치는 연기가 뛰어나다기보다는 진심을 타고난 것처럼 말없는 준세이에게 다가갔다. 준세이는 영원이라 믿었던 사랑을 내치고선 침묵으로 몸을 감싼 남자다. 서른살, 끝없는 회한, 재회를 기다리는 막막한 세월, 꼭 겪지 않아도 되었을 나쁜 일들. 준세이는 그 많은 사연을 삭이면서도 사랑을 애원하는 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내주려고 애쓰는 착한 남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케노우치는 눈으로만 손끝으로만 십년의 러브스토리를 우리 앞에 갖다놓았다.
잔잔한 눈빛을 가진 다케노우치는 ‘모델 출신 일본 탤런트’라는, 경박하게 들리기 쉬운 라벨을 붙이고 있다. 그토록 잘생긴 남자라면 어머니와 누이가 모델의 세계로 등을 떠밀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케노우치는 줄줄이 들이닥치는 TV드라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늘 영화를 하고 싶어했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하루에 세편도 봤다는 그는 “어느 순간 보기만 하는 관객에서 직접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극성스러운 집안 여자들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러나 그는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준세이가 ‘연인들의 성지’ 피렌체 대성당에서 만나자는 아오이와의 약속을 십년 동안 잊지 못한 것처럼, 다케노우치도 십년 가까이 어느 곳에선가 영화와 만날 날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TV는 잊혀지지만, 영화는 내가 죽어도 남아 있다”고 말한 다케노우치. 그는 묘하게도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수백년 전 그림에 다시 수백년의 생명을 부여하는 회화 복원사를 첫 번째 영화에서 떠안았다.
2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가 함께 써내려간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떨어져 있는 두 연인을 남자와 여자 작가가 각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형식. 소설과 달리 비교적 평이하게 진행되는 영화는 두 인물 중 준세이의 시선을 택했다. 처음 영화에 출연한 다케노우치에게는 그것이 부담이면서도 행복이었다. “드라마처럼 그때그때 연기를 확인할 수 없어서 어려웠다. 그러나 한편의 소설에 몇달 동안 집중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한신 한신이 너무도 소중하다.” 이제 영화는 끝났고, 다케노우치는 다시 TV로 돌아갔다. 몇년 전, 드라마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찍으면서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의 마음을 “그녀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 단지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세상에는 말로 하지 못하는 사연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언젠가는 또 다른 영화에서 그 진심을 보여줄 것이다. 준세이는 말이 없는 남자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에선 “내게 돌아와줘, 아오이”라는 다케노우치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들려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