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카시아>로 5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배우 심혜진
2003-10-16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스테인레스 나무의 느낌,받으셨나요?

그녀가 돌아왔다, 라고 말한다면, 스크린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오만을 범하는 일일 것이다. 드라마와 방송 활동에 주력했던 배우 심혜진의 새 영화가 개봉한다. <실락원>(1998)이후 5년 만의 신작이고,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더불어 영화(榮華)를 누렸던 ‘1990년대 스크린 스타’의 호칭이 과거시제가 된 지도 3년이 지났다. 심혜진과 영화를 붉고 질긴 실로 다시 이어준 작품은 박기형 감독의 <아카시아>. 박기형 감독에게는 심혜진이라는 배우를 적절한 예우로 스크린에 다시 초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의욕의 촉매가 됐고, 심혜진에게는 ‘미숙’이라는 고요한 극중 인물과 “당신 아니면 안 된다”는 감독의 요란한 확신이 거절할 수 없는 초대가 되었다. 심혜진은 여의도 약속장소에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섰다. 시간은 그녀의 유명한 볼우물에 찰랑이던 청량한 물기를 거두어갔지만 대신 갸름한 눈과 입술에 굳센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다. 어디 아주 먼 곳에라도 가는 듯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달콤한 케이크를 잔뜩 주문하고는 눈으로 물었다. “자, 뭐가 궁금하죠?”

오랜만에 집중적으로 인터뷰가 이어지는 나날이겠네요. 너무 피곤해요. 아마 배우나 연예인들은 인터뷰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을걸요? 인터뷰해서 별로 좋은 결과가 없으니까. 사람 만나는 건 좋아하지만 똑같은 이야기를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복하려니 조금 체력이 달리네요.

나오는 질문도 비슷하죠? <아카시아>가 부산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기분이 어떠냐, 오랜만에 영화하니 어떠냐가 제일 많죠.

인터뷰하러 오면서 <그들도 우리처럼>(1990)에서 심혜진씨 모습이 문득 떠올랐어요. 탄광촌 다방 아가씨 영숙이가 얼굴이 안 보일 때까지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내 이름은 영숙이가 아니라 이금란이에요’ 하던 장면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어요. 요즘 전지현씨를 보면, 그맘때 심혜진씨가 비슷한 케이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일부러 옛날을 회상하지는 않는데… 얼마 전 <세상 밖으로>를 오랜만에 봤는데, 내가 지금 전지현씨만큼 머리가 길더라고요. 나, 내 머리가 그렇게 길었는지 잊고 있었어요. 참, 이상하죠? 긴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더라고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란 별로 특별하진 않구나 싶었어.

궁금한 것은 <초록물고기> 이후의 일이에요. <꽃을 든 남자>(1997), <마리아와 여인숙>(1997),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실락원>(1998)의 시기인데, 이 영화들이 남긴 경험을 어떻게 자평하나요? <초록물고기>까지 정말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을 많이 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운이 다할 때가 있잖아? 작품운이나 선별능력이 없어질 수도 있고. 시나리오는 내가 직접 봤어요. 하지만 흥행이 안 돼서 좋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건 선입견이기도 해요. <꽃을 든 남자>나 <마리아와 여인숙>이나 두 감독이 모두 TV드라마에서 영화로 전화한 분들이야 경험 미숙도 있었고 계산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나쁜 영화라고 생각지 않아요.

<초록물고기>를 마치고 영화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텐데요. 그 영화들을 선택한 건 시나리오가 완성도뿐 아니라 여배우에 줄 수 있는 메리트를 갖췄다고 판단해서 아닌가요? 인맥이나 내부적 관계, 여러 요소가 있었어요. <꽃을 든 남자>는 같이 드라마를 했고 내가 팬이었던 황인뢰 감독님의 의뢰라는 점이 컸어요. <마리아와 여인숙>도 비슷한 이유가 있었지만 시나리오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원래 내 영화를 민망해서 잘 못 보는데 가끔 케이블에서 나와 못 이긴 척하고 보면 지금도 괜찮더라. 내 작품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내 작품이라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영화도 있어요. <실락원>이요? 사실 내가 선택된 것이 괴로웠어요.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다른 작품 배급문제가 얽힌 부분도 있었고. 배우가 항상 자기가 좋다고 영화를 선택하는 건 아니에요.

2000년쯤 캐스팅 소식이 있었던 왕가위 감독의 은 어찌된 거죠? 은 전혀 안 찍었어요. 왕 감독의 제트톤필름과 계약을 정리하고 끝냈어요. 시나리오는 원래 없고 시놉시스만 받았죠. ‘부산’ 편에서 찍으려고 한 대목이 어떤 이야기인지는 왕가위 감독만 알아요.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양조위도 모르고, 장만옥도 몰랐어요.

영화에서 심혜진씨의 주도적 이미지로는 훼손된 순수나 구원의 여인상이 기억에 남는데, TV드라마에서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강조됐죠? 복잡하고 다면적인 게 인간이고 그중에서도 제일 복잡한 인간이 배우예요. 잠재된 성격이 작품에 의해 하나씩 끄집어 올려지는데 그러다보니 다중인격이 되지. 이런 역 저런 역 다 하지만 어떤 역을 하면 각별히 빛날 때가 있잖아요? 그게 그 사람한테 가장 농도 짙게 자리한 요소겠죠. <마지막 전쟁> <아줌마> 하면서 나의 다른 면이 노출되어 반응이 두렵다기보다 편하고 속이 시원했어요.

사실 20대 중반 이후 여성캐릭터를 만드는 솜씨에 있어서는 아직 영화가 TV드라마를 쫓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죠. 영화는 TV보다 굉장히 느려요. 영화는 TV만큼 대중매체가 아니에요. 시간이 걸리는 매체잖아요. 하루에도 수십 가지로 변화하는 유형을 기계적으로 찍어낼 수 있는 것이 TV야. 영화는 한 감독의 팀이 움직이지만 방송사는 조직이 움직이죠. 조직이 움직이는 가운데 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경쟁까지 하죠. 그러니까 앞서가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배우들은 방송에서 기증적으로 연기를 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내가 연기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게 드라마의 단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TV가 영화의 깊이는 없다 해도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매체 같아요. 항상 옆에 있는데 없으면 돌아버리죠. 그런데도 드라마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죠. 사람들이 매일 극장에 갈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지금 영화계에서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등 주로 남자배우들이 연구할 만한 자기 세계가 있는 배우로 주목받는 데에는, 개인의 뛰어난 능력도 능력이지만 관객에게 이 배우들의 훌륭함을 음미할 기회를 주는, 그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영화가 제작되는 현실도 중요한 전제다 싶어요. 반면, 여배우들에게는 능력을 계발하고 다양한 면을 보여줄 기회 자체가 희귀한 게 아닐까요? 아니, 그런 기회는 내가 먼저 가졌지. 지금 말한 배우들에게는 기회가 늦게 온 거고요. 기회는 공정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시기의 문제죠. 나는 지금 영화도 드라마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송강호씨나 설경구씨는 지금 드라마를 안 하겠죠. 그것도 하나의 기회를 놓치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한번쯤 변화는 찾아올 수 있는데 어떤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면역성으로 따지면 누가 나만 하겠어요? 난 배우들한테 영화만 고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나도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닌 것 같아요.

TV를 기피하는 것은 소모된다는 느낌 때문 아니겠어요? 그럼, 영화는 소모되지 않나? 어차피 다 소모성이에요. CF는 그럼 왜 찍어요? 만약 나처럼 영화로 시작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TV에서 시작한 친구들이 더 그렇게 말하잖아요. TV의 생리를 알면 더 효과적으로 이용해야죠.

30대 여배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가 부족하다는 일반론 전에, 영화활동을 중단한 5년간 심혜진씨가 거절한 시나리오, 원했지만 캐스팅 안 된 작품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5년 동안 몇 작품 없었겠어요? 서로 여건이 안 맞아서 못한 거니까 지난 이야기를 해서 좋을 일은 별로 없겠죠. 잘 모르는 신생영화사도 많았어요. 기획이 도중에 엎어질까봐 믿을 수 없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 시나리오를 믿을 수 없었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영화를 할 생각이 안 드는 거죠. 마음에 안 드는데 시작하면 끝이 안 좋은 걸 경험으로 아니까 미련을 버렸어요.

박기형 감독님이 심혜진씨에게서 있는 ‘메마름’의 이미지가 <아카시아>의 미숙 역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다는 말씀도 들었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왜 그랬을까? 내가 메말라 보여요?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아. 나무에 꽃도 있고 가지도 있고 다 갖춘 것같이 보이는데 뭔가 촉촉함이나 온기가 없어 보이는 거. 스테인리스처럼 만지면 차갑고 겉보기에는 메마르고. 보통 우리 나이가 되면 부족하건 넘치건 보통은 가정이라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잖아요? 둥지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이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어요. 아니, 그런데 감독은 안 그런가, 뭐? (웃음)

결혼이 그렇게 사람을 많이 바꿔놓나요? 나는 예전에 결혼을 2개월 만에 끝내서 얼마나 사람을 바꿔놓는지는 몰라요. 그러나 분명히 사람을 대하는 느낌과 가치관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서 할 수 있었던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안 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 <아카시아>!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감독이 느낀 메마름이라는 것이 있었던 거잖아. 자식이나 남편이 있는 사람하고는 다른 마르고 이기적인 분위기.

<아카시아>는 가해자를 끝까지 숨겨야 하니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다가 컷도 많아서 호흡 조절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오랜만에 영화를 하는 주연 여배우로서 좀더 숨이 길고 화려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텐데요. 원래 스크린에서 예쁘게 보이는 걸 싫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얼굴만 예쁘게 많은 신에 나오면 뭐해요. 관객이 쟤 그만 들어갔음 좋겠다 하면 무슨 소용이야. 많이 나오더라도 긴장감 있게 봐주고 미숙이 나오면 무슨 일일까? 저 여자는 왜 속고 있는 걸까?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보다 화려한 연기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거기 초점을 맞춰줬으면 하는 바람이 감독과 제작자에게 있었어요. 어차피 시나리오부터 여배우가 화려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나는 좋은 작품으로 돌아오고 싶다, 흥행도 잘된다면 바랄 게 없지만 무엇보다 이른바 후진 작품에 출연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전제조건을 달았어요.

<아카시아>의 미숙이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입양했다고 보세요? 결혼 안 해도 아이를 갖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는 미숙이 그런 심정과 흡사할 거라고 가정했어요. 남편과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예요. 예컨대 내가 독신인데 아이를 갖고 싶다, 결혼은 싫고 몸은 망가지기 싫고 일은 계속해야 한다고 쳐요. 그렇다고 아무 아이나 가질 수는 없겠죠? 미숙의 상황을 그것과 비슷한 경우로 봤어요.

<아카시아>의 가족은 전혀 사악한 사람들이 아니죠. 그런데도 ‘이 애가 없었다면 더 나을 텐데’라는 티끌만한 무의식이 비극을 불러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라고 부모가 편애를 하지 않을 것 같나요? 우리집을 봐도 주변 사람들을 둘러봐도 같은 친자식이라고 해도 생각하는 마음이 똑같지 않아요. 내 뱃속으로 낳았거니 생각해서 드러내지 않을 뿐이죠. 그런데 <아카시아>는 친자식이 아니니까 한꺼풀 씌워서 보이는 거예요.

<아카시아>에서 미숙과 남편은 영화 도입부에서는 연인처럼 다정한 부부인데 가족 안에 비밀이 생긴 것만으로 둘 사이의 별다른 계기도 없이 완전히 관계가 파괴됩니다. 상대역 김진근씨와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분석하고 연구하면 되는 작품이 있고 아닌 작품이 있어요. 이 부부는 분석할 만한 상황을 갖고 있지 않아요. 특별히 싸움도 문제도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10년간 잘 지낸 부부가 거꾸로 다정하면 얼마나 다정하겠어?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떤 깊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이걸 의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죠. 깊은 대화없이 농담 따먹기나 하고 “가니? 갔다와” 하면서 각자 다른 라이프 스타일로 사는 부부의 느낌이 김진근씨와 나의 실제 상황과 딱 맞는다고 봤어요. 그리 친하지도 않으면서 현장에서 인사하고 농담하고 일할 때는 일하는 관계와.

10년의 연기생활을 하면서 여자의 아름다움이나 배우의 힘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겠지요. 어렸을 때는 그냥 뭐 얼굴 예쁘고, 사람들 말하는 대로 내면의 미도 가꾸면 되겠지 했어요. 하지만 이제 여자는 가장 부드러울 때 아름다운 것 같아요. 항상 헤헤거리고 상냥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제압할 수 있고 아무리 성격 더러운 사람 앞에서도 분위기를 평정할 수 있는 부드러움을 말하는 거예요.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계발하고 도전하고, 뭐 거창한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을 훈련하고 취하면서 얻는 힘은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아름다움과 힘이 돼요.

특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중년 여성이 있나요? 나! 하하하. 글렌 클로즈와 미셸 파이퍼가 좋아요. 그들의 연기는 힘이 넘쳐나지 않아요. 너무 부드럽고 일상적인데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올해 방송통신대 방송정보학과에 진학하셨죠? 영화음악 프로그램 DJ도 4년째인데 방송인의 전망을 동시에 키우고 있는 건가요? MC나 DJ는 매체를 이해해야만 실수를 안 하겠구나 싶었고 배우려는 욕심이 생겼어요. 앞일을 알 수 없지만 라디오를 하다가 시사 프로그램을 할 수도 있고 아침 방송을 하면서 시사 한 꼭지를 내보낼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정확한 의사전달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배우는 연기자들하고만 연결되는데 방송인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어차피 이 나이가 되면 내가 구성한 ‘나의 사회’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내 사회성이 인정되고 성격이 평가되고 레벨이 정해진다고 생각해요. 요새 중간고사라 시험이며 과제물이며 무지 바빠요.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얘네들(<아카시아> 홍보팀)이 이렇게 뺑뺑이를 돌리네. 통 공부할 시간을 안 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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