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진주만>과 1998년 <아마겟돈>. 두 영화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제리 브룩하이머와 마이클 베이 군단의 ‘여름 극장가 습격작전’ 선봉장이라는 점. 그리고 또 하나, 배우 벤 애플렉이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유성을 폭파하러 까만 우주공간 속으로 떠났던 풋내기 청년 A.J.가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파일럿 래프 매컬레이로 2년 만에 귀환한다.
<진주만>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두명의 젊은 파일럿 래프와 대니, 그리고 아름다운 여군 간호사 에블린이 펼치는 삶과 사랑이야기다. 전후세대인 벤 애플렉은 파일럿 래프의 캐릭터와 당시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진주만 폭격에 관한 책을 읽었고, 촬영장을 찾아온 퇴역군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역사 속 ‘진주만’과 영화 <진주만>에 대해 그는 균형있는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인다. 결과가 어찌됐든. “<진주만>이 맹목적인 애국심을 선전하는 영화라고 판단했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일본인들도 존경받을 만한 국민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미국의 위협을 받았다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리쎌 웨폰> <백 투 더 퓨처> 같은 영화를 보며 자랐고, 최고의 영웅은 브루스 윌리스였던 어린 시절, 어머니 손에 끌려 구경했던 <앙드레와의 만찬>(My Dinner with Andre) 같은 영화는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벤 애플렉이 어떤 식으로든 ‘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한 일로 살아가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연기의 첫걸음은 버거킹 광고였다. 버거킹 꼬마는 몇년 뒤 8살이 되었을 때 PBS TV쇼 <미미의 항해>(The Voyages of Mimi)에 출연, 엔터테인먼트계로 진입한다. TV쪽을 전전하던 그에게 영화계 진입의 기회가 온 것은 몇년 뒤.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코미디 <데이즈드 앤드 컨퓨즈드>(Dazed and Confused, 1993) 출연배우로 벤 애플렉을 고른 것이다. 물론 아주 작은 배역이었지만. 그러나 주류의 달콤함을 잠시 맛본 벤 애플렉은 인디영화로 선회한다. 인디쪽의 모험이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몰랫츠>(1995), <고잉 올 더 웨이>(Going All the Way, 1997), 레즈비언을 사랑한 만화가를 연기해 인디계의 스타덤에 올랐던 <체이싱 아미>(1997)까지, 차분히 연기경력을 쌓아나갔다.
죽마고우 맷 데이먼 없는 벤 애플렉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8살 때 처음 만난 맷 데이먼과는 처음에 리틀 야구단을 함께했고, 나중엔 드라마 수업을 함께 들었고, <굿 윌 헌팅> 각본을 함께 썼고, 나란히 스타덤에 올랐다. <굿 윌 헌팅>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체이싱 아미> 이후, 벤은 모든 것이 짜증스러워졌다. 다른 배우들을 돌고돌아 자기에게까지 오는 배역들에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플롯을 구성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말지! 맷과 벤은 생각을 실행에 옮겼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도그마>(1999), <포스 오브 네이처>(1999), <레인디어 게임>(2000) 등 장르를 굽이굽이 거쳐온 벤 애플렉은 올해도 <제3의 바퀴>(The Third Wheel) <체인징 레인스>(Changing Lanes) <제이와 사일런트 밥 역습하다>(Jay and Silent Bob Strikes Back) 등으로 자신을 담금질하고 있다. 브루스 윌리스 옆에 서는 것도 영광이었던 햇병아리 배우에서, 차세대 ‘가장 미국적인 영웅’으로 도약할 준비도 하면서. <진주만>의 젊은 파일럿 래프는 또 하나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