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제임스 맨골드 감독과 존 쿠색, 레이 리오타가 말하는 <아이덴티티>
2003-10-21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아이덴티티>의 해외 언론 시사회가 있었던 지난 4월16일 저녁, LA 웨스트 우드의 시사회장을 나서는 기자들의 공통된 고민은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얼마만큼 천기누설을 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해지기가 무섭게 인적이 끊겨버린 LA의 밤거리로 나서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거짓말처럼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영화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둠 속에서 궁리했을지도 모른다. <식스 센스>와 <디 아더스>는 차치하고라도 웬만한 반전에는 어지간히 면역됐다고 자부하는 본 통신원도 동행과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퍼즐 풀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 & 레오폴드> <걸 인터럽티드>를 위시한 앙상블 캐릭터드라마가 주장기인 제임스 맨골드 감독과 컬트영화 <잭 프로스트> 시리즈의 작가, 마이클 쿠니가 쇠락한 왕년의 여배우와 전직 경찰인 리무진 운전사 에드(존 쿠색), 살인범을 운송 중인 다혈질의 수송경관 로드(레이 리오타), 플로리다에서 새 삶을 꿈꾸는 전직 라스베이거스 창녀, 뭔지 모를 사소한 일에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 신혼부부, 리무진에 치여 중상인 아내와 말없는 아들을 동행한 무기력한 중년 가장에 도대체 믿을 수 없음직한 모텔 매니저까지, 한눈에도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10명의 등장인물을 폭풍우 몰아치는 고속도로변 외딴 모텔에 몰아놓고 얽어낸 퍼즐의 제1규칙은 스릴러와 호러라는 영화 장르의 규칙에 ‘딴죽 걸기’다.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제임스 맨골드(오른쪽) 감독

결국 다음날 <아이덴티티>는 스릴러의 뼈대에 슬래시호러의 탈을 쓴 사이코드라마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품에 안고, 주연배우 존 쿠색, 레이 리오타와 제임스 맹골드 감독의 인터뷰가 예정된 소니픽처스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런데 먼저 인터뷰를 마친 취재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제임스 맹골드 감독은 그의 첫 번째 스릴러에 대한 기대를 반영이라도 하듯, 조목조목 친절하게도 영화에 대한 온갖 설명을 아끼지 않았으나, 인터뷰에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존 쿠색과 레이 리오타는 단답형 대답으로 일관한다는 비보다. TV카메라까지 돌아가는 인터뷰룸에 이 대답없는 배우들과 단둘이 마주 앉아서 하나라도 더 퍼즐조각을 찾아야 한다.

영화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심쩍을 정도로 착실하게 스릴러 장르의 규칙을 따라가는 구성에 대해 제임스 맹골드 감독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존 카펜터의 <더 씽>에서 빌려온 서스펜스와 충격의 규칙을 실험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정작, 맹골드 감독이 선사하는 충격은 살인범의 정체가 모호해질수록, 화면에 피가 낭자할수록 강도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중반을 거쳐 너무나도 ‘전형적인’ 스릴러가 아닌가라는 관객의 의구심이 증가할 때쯤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드러난다.

“관객을 철저히 속이기 위해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맹골드 감독은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영화가 더이상 자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넌시지 암시하는 장치를 치밀하게 숨겨두었다. 모텔 살인사건 스토리와 평행하게 진행되는 다중인격 살인자에 대한 선고장면은 평소 정신장애로 나타나는 숨겨진 인간성의 여러 면모, 그중에서도 숨겨진 어두움에 관심이 많은 맹골드 감독만의 장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존 쿠색과 레이 리오타는 촬영 내내 세트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서 있어야 했던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말했다.

놀라운 반전을 위해 전형적인 스릴러 규칙이 필요했듯이, 10명의 등장인물들 또한 한결같이 “비밀과 결점을 감춘” 전형적인 호러 혹은 스릴러의 캐릭터들이다. “심각하고 어두운 캐릭터지만 관객의 정서에 호소하는 섬세한 인간미를 동시에 표현한다”는 이유로 에드 역에 캐스팅된 존 쿠색은 자신이 맡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캐릭터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의 비밀은 있지 않나”는 쿨한 멘트를 날린다. 평소에 스릴러영화를 많이 보지만, “영화 중반이 지나자마자 반전이 일어나고도 한참이나 더 관객을 놀라게 하는 스토리가 진행되는 구성은 처음이라” <아이덴티티>를 선택했단다. 그 흔한 공식석상용 웃음 한번 시원하게 보여주지 않고, 담담하게 영화촬영 내내 세트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 서 있었야 했던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말하는 존 쿠색은 확실히 ‘어딘가 모르게’ 위험한 에드 역에 제격이다.

이에 비해 누가 봐도 위험한 다혈질 경관 로드를 연기한 레이 리오타는 웃음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이 연기한 로드가 ‘나쁜 경찰’은 아니라고 말한다. 맹골드 감독은 처음부터 로드 역에 그의 초기작 <캅랜드>에서 함께 작업했던 레이 리오타를 점찍고 있었다고 한다. “위트와 재기가 있으면서도 언제 야수같이 폭발할지 모르는” 성격배우, 레이 리오타의 이미지가 존 쿠색의 이미지와 흥미로운 앙상블을 이룰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세트장의 차가운 물줄기에 떨며 “왜 에드만 레인코트를 입고 있냐”며 극중 라이벌답게 실로 뼈가 담긴 농담을 던졌다는 레이 리오타는 <아이덴티티>의 명장면으로, 살아남은 4명의 등장인물들이 한방에 모여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는 밀실장면을 꼽았다. 두려움과 폐쇄공포증으로 이성을 잃어가는 주인공들의 극한 감정 충돌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이 밀실신은 맹골드 감독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신이기도 하다. 감독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악몽 같은 사건의 대부분이 일어나는 ‘출구없는 모텔’은 그 자체로 영화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결국 ‘아이덴티티’밖에 아무도 남지 않은 <아이덴티티>의 무시무시한 악몽은 오는 10월31일 한국의 관객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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