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 웃기려 하면 할수록 정색하죠 ˝ <위대한 유산> 임창정
2003-10-22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이런, 이런, 저 사람이 임창정 맞을까. 늦은 밤 스튜디오로 벌컥 들어온 그는 몇 시간 전 스크린 속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다. ‘실제 보니 더 멋져요’도, ‘화면발 잘 받으시네요’도 아니라 그냥 ‘그분이 이분이시네요’다. 스타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광채가 환각현상을 일으키는 탓인지 몰라도, 화면 속 인물과 현실의 스타는 달라 보이게 마련. 한데 눈앞의 임창정은 <위대한 유산>의 창수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그건 혹시 임창정이 그만큼 캐릭터 속으로 쑥 들어가 제대로 연기를 펼쳤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혹시 임창정이 그만큼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편안한 인상으로 우리를 매혹한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위대한 유산>의 창수는 할인마트의 시식코너를 ‘부페’식으로 섭렵하고, 비디오와 만화로 정서를 ‘함양’하며, 경품 이벤트마다 응모해 살림에 기여하려는 프로급 백수. 동갑내기 소꿉친구인 형수의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얹혀 살며 뻔뻔한 일상을 지낸다. 어찌 저리 잘 어울릴꼬, 탄성이 나올 정도로 창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 임창정은 “이건 내 경험과 관계없답니다”라고 발을 슬며시 뺀다. 사실, 서른해를 살아오는 동안 임창정은 한번도 백수가 된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뭔가 일을 했다. ” 그가 백수의 헐렁한 일상 대신 가스 배달, 록카페 서빙, 벽보 부착 등 온갖 일을 했던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고,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이기도 했다. 또 내면으로 축축하게 흡수된 다양한 경험은, 결국 다양한 캐릭터를 풍부하게 소화하는 그의 연기로 드러나고 있다.

스스로의 경험이 없음에도 임창정이 백수 역할을 실감나게 해낸 비결은 바로 ‘모방’이었다. “제 친구 중에 김XX라는 애가 있거든요. 걔 이름 나가면 정말 안 되는데…. 하여튼 그 친구가 창수하고 비슷한 점이 많아요. 자주 만나면서 이럴 때는 이런 표정을 짓는군, 이런 눈빛을 하는군, 이렇게 준비를 했죠.”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는 사실은 ‘임창정이야말로 진짜 인간 복사기’라는 것. 다른 이의 특징을 정확하게 집어내 완전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알고 보니, 그는 역할이 주어지면 항상 그 캐릭터와 가장 비슷한 친구를 자주 만나며 준비를 해왔다. <색즉시공> 때는 아예 캐릭터 연구의 ‘모델’이었던 친구의 이름을 영화에서 그대로 사용했을 정도다. 결국 <비트> <해적, 디스코왕 되다> <색즉시공> 등에서 임창정이 세상 언저리의 인물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끼 위에 다양한 노력을 꾸준히 쌓아올렸기 때문인 셈이다.

<위대한 유산>은 그런 그에게 커다란 과제를 안겨준 영화였다. 이 영화를 찍던 어느 날, 임창정은 세트장을 뛰쳐나와 흑흑 흐느꼈다. 아니, 코미디를 찍다가 웬 눈물, 할지 몰라도 임창정에게 그때만큼 비참하고 답답한 순간도 없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스스로를 탓하게 한 그 장면은 퀴즈 프로그램에 나간 김선아와 통화하면서 눈물을 쏟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신이었다. 30초가 좀 넘는 긴 테이크를 한번에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감정을 잡는 게 중요한 장면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내가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창정아, 너 연기하고 있구나.’ 감정이입이 안 되고 가식적인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끝내 감정을 잡아내지 못해 다음날로 촬영을 미뤘지만,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지쳐 있던 스탭들은 그에게 “파이팅”을 외쳤고, 미영 역을 맡은 김선아도 “나라면 이렇게 할 거야”라고 도움을 줬다. 결국 4일째 되는 날, 67번째 테이크에서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때는 아무런 느낌이 안 들더라구요. 정말로 미영이만 생각했으니까.”

그 장면을 찍던 일이 충격이었는지, 임창정은 스스로가 한계에 부딪혔다고 느끼고 있다. 그는 이 고비를 넘어서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재충전할 생각도 가졌지만, 일단 일로 풀어보자는 각오로 새 작품 <처녀귀신 때려잡기> 준비에 들어갔다. “아직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단계는 아니지만, 공포엽기코미디쯤 되는 분위기인데 굉장히 재미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처녀귀신…> 또한 <위대한 유산>이 그랬던 것처럼 그와 ‘코드’가 맞는다는 얘기다. “코드? 무엇이라고 딱 이야기하긴 어렵고, 내가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지칭하는 거죠.”

그렇다면 그 또한 누구처럼 자신과 코드가 맞는 영화만 하겠다는 건가. 혹시 추레한 인물을 맡는 게 지겹진 않을까. 코미디 연기에 물리진 않았을까. 임창정씨, 이젠 변신하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변신이라는 거요,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르겠어요. 아니 변신할 줄을 알아야 하지. 마흔 먹고 쉰 먹고 연기를 계속하다보면 내가 변해서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얼마나 변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 코미디

배우 혼자서 이리저리 날뛴다고 웃기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나는 철저하게 상황 위주의 코미디를 하려 해요. 그러니까 나는 진실된 행동을 열심히 하려 하지만 상황이 웃기는 거죠. 웃기려 하면 할수록 정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가수 은퇴

잘한 것 같아요. 이젠 정규앨범을 안 내고 TV 가요 프로그램에 안 나가는 거죠.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그냥 콘서트를 열면 되는 거고, O.S.T 앨범에서 한두곡쯤은 부를 수도 있겠죠. 연기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날 거고요.

- 고향

좀 있다가 고향인 경기도 이천으로 주소를 아예 옮기려고 해요. 서울에 살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어요. 이천에 고깃집을 차린 것도 그런 차원이고요. 거기서 친구, 선배, 후배들과 잘 놀아요. 그런데 다들 나한테 이렇게 물어요. “네가 어떻게 배우가 됐냐”고. 그럼 난 이러죠. “난 가만히 있는데 지들이 와서 찍는 거여.”

- 야심

<시네마천국>을 정말 좋아해요. 그런 영화를 한번 하고 싶어서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황씨 아저씨>라고. 황씨 아저씨는 어릴 때 우리집에 자주 왔던 아버지 친구분인데, 이분과의 추억을 따뜻하고 소박하게 담아보고 싶어요. 연출? 좀 준비해서 당연히 제가 해야죠. 또 하나는 프로 골퍼가 되는 것. 사람들에게 도전과 쟁취는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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