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아카시아>와 한국 가족호러영화들
2003-10-23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공포를 매개로 가족을 생각하다

2003년, 한국영화는 유난히 많은 공포영화를 낳았다. 공포영화가 계절 상품처럼 여름의 극장가에 밀려들어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00년 여름에도 한국영화는 공포물(이른바 ‘슬래셔무비’)의 범람을 겪었다. 3년 만에 한국의 여름을 다시 찾아온 공포영화의 홍수.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것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올해의 한국 공포영화에서는 장르의 진화를 예감케 하는 어떤 흐름이 감지된다. 장르의 진화는 ‘장르에 대한 성찰’과 ‘장르를 통한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장르를 통해 사유하려 하지 않는 한 장르에 대한 성찰은 깊어질 수 없고, 장르에 대한 영화적 성찰이 깊어지지 않는 한 그것을 현실과 대결하는 사유의 무기로 온전하게 사용할 수 없다. ‘한국형’ 공포영화의 진화를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선차적인 것은 장르를 통한 사유일 것이다. 장르를 통해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장르를 통해 지금/여기의 현실과 대면하고 대결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수입대체적 모방에서 벗어나 진정한 한국형 공포영화를 꿈꾸는 그 영화들이, 신체의 절단보다 정신적 외상을, 물리적 공포보다 심리적 공포를 그리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올해의 공포영화 중, 세편의 영화(<장화, 홍련> <아카시아>)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자못 흥미롭다. 그 세편의 영화는 모두 ‘가족의 공포’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 ‘가족호러 3부작’에는 공통점만큼이나 많은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아카시아 - ‘불안’의 물질적 형상화

<장화, 홍련>은 전통적인 원귀설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하는 방식으로 한국형 공포영화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화, 홍련>은 지금/여기의 가족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장르를 동원하고 있다기보다 장르의 변주를 위해 가족을 끌어들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무대가 된 별장 같은 집은, 말 그대로 외딴집이고, 폐쇄된 공간이었다. 미학적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공간이었지만, 그만큼 협소한 공간이고, 장르 안에 갇혀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은 <장화, 홍련>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족의 공포에 접근한다. 그것은 이제 가족을 이루어야 할 나이에 이른 어떤 세대가 지금/여기의 ‘가족(제도)’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과 근본적인 의문을 무대화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은 근본적으로 ‘성장영화’였다(단, 그러한 두려움을 무대화하기 위해 굳이 과거의 특별한 외상적 체험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장르의 역사 안에서 수없이 반복돼왔던 ‘상투구’에 불과하며, 현재의 ‘가족(제도)’에 대한 보편적인 두려움과 의문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도 부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가족(제도)에 대한 두려움과 의문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 두려움의 원인은 특별한 외상적 체험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보편적인 ‘일상’ 속에서 포착되고 질문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결혼 적령기를 앞둔 사람들을 옥죄고 있는 사상 초유의 ‘청년 실업’ 현상 같은 것 말이다). 다소 도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카시아>는 <장화, 홍련>과 그림같이 예쁜 외딴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과는 온전한 성장(온전한 가족의 실현)에 실패한(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체가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호텍스트적 공명 속에서도, <아카시아>는 앞선 두 작품과는 다른 어떤 차이를 담고 있다.

<아카시아>의 무대인 전원주택은 <장화, 홍련>의 그것만큼이나 세상과 고립되어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는 그런 곳이다. 반복구처럼 등장하는 아카시아 나무는 그 집에 드리운 ‘아름다운 불길함’ 즉 ‘불안’의 물질적 형상화이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기완결적인 미학적 공간도 세상과 단절된 폐쇄적 공간도 아니다. 산부인과 의사인 남편 도일(김진근)과 직물공예를 하는 부인 미숙(심혜진), 그리고 더없이 자상한 조각가인 시아버지. 그들은 유일한 결핍이었던 ‘아이’문제를 입양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영화는 죽은 엄마를 잊지 못한 채 이상한 버릇을 보여주는 진성(문우빈)의 모습을 통해 닥쳐올 공포와 파국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지만, 정작 그 파국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진성을 처음 대면하는 친정 어머니의 싸늘한 시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핏줄에 대한 주술적 집착. 그것이 평화롭고 한적한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자궁 속에서부터 마치 원죄처럼 우리를 휘감고 있는 핏줄, 죽어서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핏줄(영화의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두개의 핏줄!). 영화는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그 핏줄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진정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 핏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아카시아 나무는 친정 어머니의 대립적 상관물이다. 친정 어머니의 종교적 주술은 아카시아 나무의 악마적 마술을 부른다. 그 친정 어머니가 진짜 핏줄(혜성)의 유모차를 끌고, 몇년 만에 잎과 꽃을 피운 그 아카시아 나무와 대면하던 순간의 긴장과 불안!

새로운 가족윤리를 탐색한다

박기형의 영화에서 현실의 ‘악’과 ‘비극’의 원인은 늘 기성세대이다. <여고괴담>(1998)에서 ‘미친 개’와 ‘늙은 여우’로 대표되는 교사가 그렇고, <비밀>에서 딸의 친구와 원조교제를 했던 아버지가 그러하며, <아카시아>에서 핏줄에 대한 지독한 집착을 보여주는 친정 어머니와 무기력한 시아버지(<아카시아>의 비극은 극성맞은 친정 어머니만큼이나 모호하고 무책임한 시아버지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 점은 <장화, 홍련>과 <아카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징후적인 현상이다)가 그러하다. 박기형은 ‘세대 간의 갈등’을 매개로 현실을 진단하고 사유하며, 그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그 변화하지 않는 ‘뿌리 깊은 반복’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상투적인 접근법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감독 박기형은 이러한 상투성을 통해서(어떤 의미에서는 그 상투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임으로써) 끝내 새로운 영화적 의미와 현실에 대한 메시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여고괴담>에서 두 교사가 보여주는 행태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과장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상투성은 과장되고 반복됨으로써 단순한 영화적(장르적) 상투성을 넘어서 진정으로 두려운 현실의 초상화가 된다. <여고괴담>에는 아주 인상적인 한 시퀀스가 등장한다. 영화 속의 현재 시점으로 교실에서 ‘미친 개’가 되어 지호에게 폭력(“니가 도사냐? 니가 무당이냐?… 반평균이나 깎아먹는 주제에…”라며 그녀의 뺨을 때린다)을 가하는 교사 오광구의 모습을 잡던 카메라는, 서서히 패닝하면서 바로 옆 복도에서 9년 전 진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손등을 때리며 ‘무당딸’이라고 경멸한다)를 주던 ‘늙은 여우’ 박기수 선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9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하나의 장면으로 통합되는 이러한 폭력의 반복은, 그 폭력이 단지 어느 한 교사의 인격적 결함 이상의 것임을, 변하지 않은 채 온존하는 ‘제도적 폭력’임을 설득한다. 때로 현실은 그 변하지 않는 상투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영화 속에서 가장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은, 9년 전에 죽었던 진주가 3년마다 다시 입학하여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교사수첩을 보고 뒤늦게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늙은 여우’가 겪는 두려움과 공포. 그것은 온전하게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기성세대=악’, ‘새로운 세대=선’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세대간의 대립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영화에는 늘 그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세대’가 등장한다. <여고괴담>에서 자신의 모교에 부임한 허은영(이미연) 선생, <비밀>의 30대 이혼남(김승우). 그들은 피해자인 어린 세대의 원한과 비밀을 들어주는 수신자이고,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매개자이다. 그들이 살아남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감독이 품고 있던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을까? 그런데 <아카시아>에서 그들(미숙과 도일 부부)은 입양아 진성이 보내는 진정한 메시지를 듣고 보지 못하며, 그리하여 스스로가 비극의 수행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그렇다면 감독의 현실과 현실의 변화에 대한 믿음은 그만큼 더 비관적이 된 것일까? 어쨌든 <아카시아>는 과 함께, ‘가족’을 이루는 것 앞에서 두려워하는 주체, ‘가족’을 이루는 데 실패한 주체가 지닌 두려움과 공포를 통해, ‘새로운 가족 윤리’에 대해 질문하고 탐색하는 ‘2부작’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위 세편의 영화는 그 서사구조(플롯)에 공통점이 있다. 영화적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결정적 비밀을 통한 최후의 반전을 위해, ‘주체의 환상(또는 망각)’을 그 수사적인 장치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 이 세편의 영화뿐이랴! 그러한 수사적 장치는 많은 현대적 ‘공포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공유자산’ 같은 것이며, 일종의 징후적 현상이다. 한편으로는 초현실적인 것이 주는 공포의 미학을 그려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그것을 상식(?) 또는 과학(?)의 틀 안에 포섭하여 해명하려고 하는 시도 또는 강박. 그러나 공포영화가 자꾸 그러한 합리적인 ‘자기 해설적’ 수사를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미학적 힘과 정서적 파장의 여운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너무나 안일한 반복이고 상투성이다. 때로 현실은 끝내 해명되지 않는 그 불가해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도 해설과 해석은 관객에게 남겨져야 할 몫이다. 그것은 마땅히 관객이 해야 할 마지막 창작 행위이며, 영화는 그것을 통해서 완성되는 그 무엇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