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모방과 위장,<다운 위드 러브>가 복사한 60년대
2003-10-23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페이튼 리드의 <다운 위드 러브>는 1962년을 무대로 한 발랄한 코미디다.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바바라 노박은 <다운 위드 러브>라는 현대여성을 위한 지침서를 쓴 신인작가이고 남자주인공 캐처 블록은 그녀가 결혼과 사랑에 매달리는 구식 여자라는 걸 증명하려고 위장해 접근하는 남성지 기자다. 둘은 당연히 사랑에 빠지지만 그 과정은 뻔뻔스러운 성전쟁이 지뢰처럼 가로막고 있다. 예스럽다고? 물론 그렇다. <다운 위드 러브>는 처음부터 복고풍을 의도한 영화이다.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21세기의 복고 vs 60년대의 모방

그러나 여기서 복고풍이라는 말은 주의해서 써야 할 필요가 있다. 복고풍 유행이야 언제나 있어왔지만, <파 프롬 헤븐>과 <다운 위드 러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복고풍’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단순한 구석이 있다. 헤인즈와 리드의 모방은 단순히 옛 영화의 분위기나 스타일을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의 영화들을 거의 완벽하게 복사했다. <파 프롬 헤븐>이 5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들을 복사했다면 <다운 위드 러브>는 50년대 말에서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던 도리스 데이-록 허드슨 주연의 코미디들을 복사하고 있다.

두 영화의 의도는 같지 않다. 토드 헤인즈의 시도는 반쯤은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였으며, 반쯤은 과거에 놓친 기회의 만회였다. 그는 서크가 만들었던 50년대 멜로드라마들의 정수를 뽑아 재현하면서 서크가 시대의 제약 속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인종차별과 동성애 이슈를 전면으로 끄집어냈다. 하지만 페이튼 리드에겐 헤인즈와 같은 묵직한 의도 따위는 없다. 아무리 봐도 그는 단지 60년대 코미디영화들의 화사한 경쾌함을 재현하고 싶을 뿐인 것 같다. 헤인즈의 시도는 진지한 드라마에서 다소 위태로울 수 있었지만 페이튼 리드가 만든 영화는 코미디로 시대착오적인 느낌은 자연스럽게 농담의 일부로 녹아든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어도 두 영화가 시도하는 옛 영화 스타일의 엄격한 복제과정은 조금 섬뜩한 구석이 있다. 둘다 결코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21세기를 사는 화가가 르네상스 시대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린 뒤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과 같다.

전에도 이런 영화들이 있었나? 멜 브룩스가 70년대에 <무성영화>라는 정직한 제목으로 무성영화를 만든 적 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컬러였고 무대는 현대였으며 사용된 슬랩스틱과 스토리는 20년대 무성영화의 단순함을 흉내내긴 했지만 여전히 70년대식이었다. 위시트 사르차나티엥의 <티어스 오브 블랙 타이거>는 연기나 스토리가 50년대 타이영화들을 모방하고 있었지만 스타일 자체는 극단적일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아무리 과거의 작품들을 모방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작품 속에 현대를 투영하게 마련이다. 과거의 스타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위장이며 거짓말이다.

<다운 위드 러브>는 <파 프롬 헤븐>보다 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다. <파 프롬 헤븐>은 서크의 영화를 흉내내고 있기는 하지만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는 어쩔 수 없이 21세기를 사는 젊은 영화인의 비전이 녹아 있다. 헤인즈에게 서크의 영화는 50년대라는 시대 배경에 좀더 엄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하지만 <다운 위드 러브>에는 어떤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그냥 60년대 코미디의 호사스럽고 귀여운 스타일을 모방한다. 오프닝 크레딧의 통통 튀는 애니메이션, 뻔뻔스러운 와이드스크린 화면, 화사한 색조, 화면분할, 성적 암시들로 가득 차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순진무구한 스토리, 간소한 연기 스타일,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자료화면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이 영화를 60년대 관객에게 들이민다고 치자. 그들은 이 영화가 2002년에 개봉된 미래의 작품이라는 걸! 거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완 맥그리거와 르네 젤위거라는 두 낯선 주연배우와 갑자기 늙은 토니 랜들, 약간 지나치게 정직한 동성애 언급, 이상할 정도로 긴 엔드 크레딧, 이십세기 폭스사 로고 뒤에 잠시 불청객처럼 끼여드는 리전시사 로고를 무시한다면 말이다. <파 프롬 헤븐>을 보는 50년대 관객은 같은 실수를 저지를 여지가 없다. 아무리 이죽거림 없이 예의바르게 1950년대 영화의 스타일과 연기를 흉내낸다고 해도 <파 프롬 헤븐>은 21세기의 영화이다.

아마 우리가 이런 시도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60년대의 스타일을 우리가 좋아한다면 그 스타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일까? 왜 과거의 스타일이 시대가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져야 할까? 화면분할과 애니메이션 오프닝 크레딧이 꼭 60년대라는 과거에만 종속되어 있다고 우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결정적으로 21세기의 관객이 여전히 <필로우 토크>나 <러버 컴 백>을 좋아한다면 그들을 위해 그와 같은 영화를 한번 더 만드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일까?

모방의, 모방을 위한

하지만 여기엔 빈틈이 있다. ‘어떤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다운 위드 러브>라는 영화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또는 복잡하게 평가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다운 위드 러브>가 60년대를 묘사하는 방법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진짜 1960년대 영화처럼 순수하지는 않다. 페이튼 리드가 묘사하는 1960년대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코미디들을 보고 자란 21세기의 영화인들이 그 영화들에 대한 비평과 선입견을 익혀 21세기식으로 반영해낸 것이다. 순수하게 사실만을 기술하는 역사책이 존재하지 않듯, <다운 위드 러브> 역시 60년대에 대한 21세기 초 사람들의 관점을 반영한다. 그것이 꼭 의도적은 아니어도 피할 수는 없다. 우린 록 허드슨이 게이이며 그와 도리스 데이가 주연한 영화들에 온갖 다양한 힌트와 암시들이 숨어 있거나 또는 그냥 우리가 암시가 있는 척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우린 그들이 그려? 뺨?(확인!!!)성대결의 이야기 속에 숨은 포스트 페미니즘의 단서들을 읽어낼 수 있고 60년대 초의 화사한 낙천주의를 베트남전과 인권운동으로 상징되는 70년대의 시대정신과 비교할 수 있다. 우린 그것들을 고등학교나 영화학교에서 배웠고 필수교양서적 명단에 오른 영화비평서에서 읽었다. 60년대 이성애자 대중처럼 맘 편하게 백지 상태에서 감상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을 만든 작가와 감독, 배우들 역시 백지상태에서 60년대 영화를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흐릿하게 숨어 있던 서브텍스트들은 노출되고 분석된다. 결국 아무리 발랄하고 무의미한 오락을 의도했다고 해도 <다운 위드 러브>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대의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 된다. 감독인 페이튼 리드나 작가 이브 알러트, 데니스 드레이크에게 어떤 적극적인 비판의 의도가 없었다는 것 자체는 상관없다. 이 경우는 영화가 만들어진 21세기 초를 사는 보편적인 영화인들의 시점이 독립적인 주체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재미있는 건 모방 자체에 있다. <다운 위드 러브>는 60년대 관객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21세기 관객을 위한 영화이며 편안하게 동시대를 묘사했던 60년대 영화와는 달리 정교하게 40년 전의 과거와 그 시대 사람들이 동시대를 묘사했던 방법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는 극단적인 긴장감을 품게 된다. 별다른 기교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도리스 데이의 결백한 연기는 르네 젤위거로 옮겨지면서 세련된 기교가 바탕에 깔린 표현주의적인 연기가 된다. 당시엔 가벼운 대중적인 스타일이었던 것이 페이튼 리드의 정교한 모방을 거치자 초현실적인 판타지가 된다. 그 과정 중 영화는 원작의 자연스러운 매력은 잃게 되지만 훨씬 다양한 의미와 고단수 테크닉을 품은 고차원적인 작품이 된다.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처럼 모양은 같거나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추가된 의미는 자연스럽게 코미디의 농담으로 전환된다. <필로우 토크>와 <다운 위드 러브>는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른 영화들이다.

그리고 이러는 과정 중 영화는 이 작품이 만들어진 21세기 초의 세계를 반영하게 된다. 그건 이성복장착용자에게 이성의 복장을 착용하는 것이 단순히 이성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 모방의 과정은 시작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담게 된다. 아마 미래의 영화사가들은 60년대 초의 발랄하고 단순한 낙천주의를 일부러 빌려와야 했던 21세기 초 영화감독들이 느꼈던 시대의 압박감에 대해 분석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운 위드 러브>의 의도적인 발랄함은 오히려 불안하고 우울한 21세기 초 미국의 분위기를 거꾸로 읽어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 이중의 위장은 은근슬쩍 이 스트레이트 러브 스토리를 퀴어영화의 분위기로 몰고간다. 어떤 비평가는 <다운 위드 러브>를 마디 그라 축제 때 동성애자를 흉내내는 이성애자에 비유했는데 그 비유 역시 그럴싸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이어가다보면 <파 프롬 헤븐>이 모방한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이나 <다운 위드 러브>가 모방한 60년대 코미디들이 모두 록 허드슨 주연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이성애자로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동성애자 배우의 허울이 후대의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영화감독에 의해 다시 정성껏 모방되고 그러는 동안 그 위장과 모방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건 즐겁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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