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윳빛 화랑의복을 갖춘 신라의 소년이 말을 달려 접근해온다. 하얗게 분칠된 얼굴과 붉은 입술이 마치 계집아이 같지만, 부릅뜬 두눈은 핏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기운이 비장하다. “계백이 어딨나! 계백이는 퍼뜩 나오라! 나와서 내 칼을 받으라카이!” 소년의 몸뚱어리는 바스러질 것처럼 가늘다. 하지만 죽기로 작정한 독기가 꼭대기까지 차올라 소년의 등을 더욱 곧추세운다.
신라의 좌장군 품일(品日)의 아들, 화랑소년 관창 역을 연기했던 양진우(25)는 그러나 관창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황산벌의 흐린 하늘과 효창공원의 선명한 햇빛이 대조됐기 때문일까. 요즘 유행하는 부드러운 밤갈색 머리에 청바지 차림을 한 관창. 낯가림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에는 독기보다 수줍음이 어려 있고, 낮고 진지한 목소리는 농담하는 여유보다 묻는 대로 대답하는 예의에 익숙해 뵌다.
“연기가 하고 싶어서 한국에 왔어요. 호주에서는 동양인이 연기하기가 불리해요. 그래서 연기는 거의 포기하고 공부만 하고 있었는데 대학교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갔다가 거기서 일본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연기가 다시 하고 싶어졌어요. 마침 호주 회사에서 일하던 누나가 한국지사로 발령나면서 저도 한국에 올 수 있었어요.” 호주 국적을 가진 양진우는 14년간의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2년 전 한국에 왔다. 전공은 국제경영학. 하지만 저녁 8시만 되면 모든 채널이 영화를 보여주는 호주에서 그는 “같은 영화도 세번씩 봐가면서” 영화에 빠져들었다. “한국에 처음 와서는 발음도 웃기고 표정도 웃기고 정서도 안 맞아서 정말 힘들었어요. 연기수업 받으러 간 첫날, 연기 선생님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셔서 애국가를 불렀어요. 근데 사람들은 그게 팝송인 줄 알았대요.” 그는 TV드라마 <대망>으로 데뷔했다. 말하자면 ‘외국인 연기자’가 사극으로 TV에 데뷔하고 사극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셈. 하지만 양진우는 “외국회사가 외국인 고용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연기는, 할 때는 너무너무 힘들어요. 정말 너무 힘들어요. <황산벌> 하면서 그 짧은 대사 하나를 분석하는 데도 한달 내내 머리가 빠질 것 같더라고요.” 그가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외국에서 14년을 살았고 한국말이 입에 붙지 않아 고생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된다. 발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판소리도 배웠다는 그의 어휘구사력은 가끔씩 놀라울 정도다. 언어문제의 고비도 넘겼으니, 비로소 물길을 타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신인들의 마음이 그렇듯, 양진우 역시 의욕이 충천할 때다. “마음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아요. 더 바빠졌으면 좋겠어요. 빨리 다른 일을 시작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것일까. 갑자기 호흡이 가빠진다. 인터뷰 내내 느린 말투로 일관하더니 이 말과 함께 엉덩이를 들썩인 것도 같다. 마치 부르는 데가 생겨서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서야 할 것처럼. 머리가 빠질 듯이 힘든 연기를 또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저 몸짓. 관창의 피맺힌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