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사극관’을 깨며 서사공간을 확장한 <황산벌>
2003년 10월, 이미 오래전에 그 패권을 TV로 넘겨준 채 변방에 머물던 한국의 ‘사극’(史劇)영화가 중원 회복을 꿈꾼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황산벌>. 한발 앞섰던 <청풍명월>이 그 영화적 기동성과 볼거리마저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린 <다모>의 내공 앞에 무력했었다면, 이 두편의 영화는 각자의 ‘비기’(秘器)를 동원하여 브라운관의 <대장금>과 3자 정립의 구도를 형성할 전망이다. <스캔들…>이 매끈하고 세련된 ‘표준어’(또는 치밀한 번안 솜씨)로 승부를 걸고 있다면, <황산벌>은 거칠고 투박한 ‘사투리’에 사활을 건다. 그 걸쭉한 사투리야말로 <황산벌>의 진짜 주인공이자 얼굴이다. 그것은 ‘코미디’ <황산벌>이 기대고 있는 웃음의 장치이고, ‘정치사극’ <황산벌>의 삐딱한 시각이자 방법론이다.
역사적 착시현상
영화의 포문을 여는 ‘동북아 4자 회담’. 4개국(당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표가 모인 자리인 만큼 당연히 회의는 ‘4개 국어’로 진행된다.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이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다. 연개소문, 의자왕, 김춘추는 각자 자기 나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화화된다. 그 웃음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착시현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빠져 있던 그 착시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해’에서 비롯되는 폭소, 때늦은 ‘자각’에서 나오는 미소. 그런 의미에서, 세명의 3국 대표가 구사하는 ‘조폭’스러운 말투는 그 의미를 반감시키는 불필요한 과잉일 수 있다. 사실 <황산벌>에서 ‘사투리’는, 평범한 병사들이 구사할 때는 낯익은 웃음의 코드에 머물지만(두 진영 병사들이 사투리 욕설 대결), 왕과 장군들이 구사하는 순간(그것도 진지한 태도와 몸짓으로 구사할수록) 참신한 울림을 지닌 웃음의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겪게 되는 그 순간적인 착각이 단지 1500년 전이라고 하는 역사적 거리에 의해서만 생긴 것일까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영화(넓게는 한국의 대중문화)는 끊임없이 ‘사투리’를 웃음의 ‘코드’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겨놓았다. 사투리가 웃음의 코드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한 ‘지역의 방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언어’로 소수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리의 언어로 각인되어 있는 사투리를 왕과 장군들이 사용할 때, 당연히 이질감과 함께 웃음이 발생한다. <황산벌>은 한편으로는 그 코드를 적극 활용하면서, 동시에 그 코드에 일정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황산벌>이 사투리를 통해 웃음과 의미를 포착해내는 것은, 두 나라 말의 대등한 충돌에서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소수어’로서의 사투리는 무엇보다 백제어(전라도 사투리)이다. 영화에는 백제의 첩자들이 신라의 말(경상도 사투리)을 세련되게 구사하지 못해서 고생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반면 신라의 첩자가 그런 고충을 겪는 과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듣고 옮기는 자로만 묘사되는데, 그 말(‘거시기’)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소수적인 비밀스러움 때문에 신라의 장군들을 불안하게 한다. 이 ‘거시기’라는 말이야말로 소수어로서의 전라도 사투리를 대표하는 어휘이고, 영화의 극적 전개를 이끌어가는 추동장치이며, 끝내 <황산벌>을 통속적 코미디로부터 구제해내는 핵심 장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대에게 차마 분명하게 하기 어려운 요구를 해야 할 때 저절로 튀어나오는 어휘이고(의자왕과 계백이 사용하는 ‘거시기’), 속시원히 토로할 수 없는 절망과 울분을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하다(‘거시기’가 자신을 지칭하는 ‘거시기’). 상대방과 일정한 교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듣지 않으면,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언어(이런 점에서 그저 훔쳐듣기만 한 신라 병사에게 그 말이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되는 것, 그리고 김유신이 계백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그 뜻을 짐작하게 되는 것은 모두 당연한 일이다). 반면 서로의 속깊은 교감을 든든한 결속으로 매듭지워주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 용도를 잃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 생명력 질긴 언어. 그 자체로는 딱히 아무것도 지칭하거나 의미하지 않으면서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을 함축할 수 있는 언어. 그것은 태생적으로 ‘소수자’의 언어이고, ‘소수적’인 언어인 셈이다. 영화는 살아남은 ‘거시기’를 통해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은근한 속내를 관객에게 말한다. 그러고보면 <황산벌>은 역사의 ‘거시기’에 대한 믿음을 참으로 ‘거시기’한 방식으로 ‘거시기’라고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황산벌>이 ‘사극’인 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황산벌 전투’처럼 국민적 상식이 되어 있는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영화는 전체적으로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의 기본 얼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 ‘짧은 기록’을 독해하는 방식은 유쾌하면서도 지극히 불온하다. 역사의 유쾌한 변주. “백제군은 신라군과의 초기 4차례 접전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백제군이 승리한 이 4차례의 초기 전투는 친절한 자막(‘탐색전’, ‘신경전’, ‘맞짱’, ‘심리전’)과 함께 압축적으로 요약된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경제적인 해결방식이다. 덕분에 우리는 치열한 전투신이라고 하는 장엄한 스펙터클을 딱 한번밖에 볼 수 없게 되지만, 동시에 물신적인 볼거리의 지루한 반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마지막 전투는 아주 ‘리얼’하다. 대개의 사극이 보여주는 전투장면과는 정반대로 그 전투에서 대사가 주어지는 것은 장수들이 아니라 일반 병사들이다. 그들은 몸과 몸이 부딪치는 접전 속에서 계속 뭐라고 ‘씨부렁’거린다. 앞에서 상투적인 ‘사투리 개그’로 희화화되었던 그들의 언어는 역사의 피해자가 내뱉는 절규가 되며, 진정한 소수자의 언어가 된다. 그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라쪽의 ‘뻐꾸기’들이 수행하는 선무 공작은, 기록의 빈틈을 채우는 그럴듯한 상상력이면서 동시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지역 감정’의 역사적 기원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상상력의 불온함
<황산벌>이 보여주는 역사적 상상력의 불온함은 무엇보다 뚜렷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실’의 전복적 독해에 있다. “출병에 앞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미리 알고 ‘살아 적국의 노비가 되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며 처자를 죽이고 출병한 계백의 백제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맞섰다.” “신라의 화랑 관창과 반굴이 각기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 죽자 신라군은 용기를 얻고 맹공격, 결국 계백을 비롯한 대부분의 백제군을 쓰러뜨리고 승리하였다.” ‘황산벌 전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이루는 계백과 화랑 관창에 관한 이 일화는 수없이 반복된 ‘국민 교육’을 통해 이제는 ‘상식’이자 ‘신화’가 된 것이기도 하다. <황산벌>은 이 ‘신화’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결국 그 의미를 뒤집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역사 허무주의가 아닌 것은, 무엇보다 그 질문이 과거의 신화화된 역사가 아니라 지금/이곳의 현실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산벌>은 묻는다. 다수자들이 말하는 ‘구국충정’과 ‘사리사욕’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라고. 그리고 발언한다. 다수자들의 논리와 신화로 인해 생긴 공백과 빈틈은 오직 ‘거시기’만이 채울 수 있는 것이라고. 이때 ‘거시기’는, 역사의 소수자였던 무지렁이 농민과 여성의 이름(또는 발언)이자, 앞으로 ‘도래할 민중’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동안 우리의 대중문화 속에서 사극의 중심지가 영화가 아니라 TV였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극이란 역사의 ‘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감질나면서도 풍족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옛날이야기의 기나긴 흐름, 샛길과 능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하소설적 서사의 분방하면서도 유장한 리듬.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장르마다 다른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극은 태생적으로 화려한 볼거리와 길고 유려한 호흡과 리듬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극의 최대 매력은 이야기의 밀도라기보다는 그 이야기의 규모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는 일정한 규모를 통해서만 이야기의 밀도를 갖출 수 있는 것이 사극 장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사정이 그동안 대부분의 TV사극이 ‘대하(대하)역사드라마’의 형식을 취해왔던 이유일 것이다. 현재 <대장금>이 보여주는 소재와 시각의 새로움도 근본적으로는 그 대하소설적 서사의 여유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영화에 주어지는 시간은 2시간 전후에 불과하다. 아마도 이것이 그간의 대부분의 한국 ‘사극영화’가 늘 ‘이야기의 빈곤’이라는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비교적 긴 상영시간을 확보했던 <무사>조차도 그 빈곤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화려한 볼거리와 밀도있는 서사는 짧은 시간 안에 공존하기 힘든 것이었다. <황산벌>(그리고 <스캔들…>)이 전복시킨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사극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판단과 기대일 것이다. <스캔들…>과 <황산벌>은 그동안 브라운관의 사극들을 통해 고정된 우리의 ‘사극관’을 깨며, 한국영화의 서사공간을 그만큼 확장시키고 있다. <스캔들…>이 다소 전복적인 제스처로 시작해서 끝내 안전한 ‘표준어’(다수어)의 세계에 안착하고 있다면, <황산벌>은 다소 상투적인 화법으로 시작해 끝내 거칠고 전복적인 ‘사투리’(소수어)의 세계에 다다른다. 그래서 그 투박하고 거친 만듦새조차도 미덕으로 보이게 만든다. <황산벌>, 참으로 ‘거시기’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