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진영에선 김동원 감독의 <송환>(가제)을 ‘블록버스터’라 부른다. 제3회 인디다큐페스티발 폐막작으로 10월3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공개되는 이 비전향 장기수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촬영에만 10년이 걸렸다. 테이프 500여개, 기록 분량 800여 시간에 이르는 이 장대한 기록의 완성을 위해 변영주 감독부터 김태일 감독까지 11년 동안 푸른영상을 드나든 이들 모두가 스탭으로 참여했을 정도다. 올해 초 편집에 들어가면서 “크레딧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김 감독은 얼마 전엔 영화진흥위원회에 지원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제작비를 얼마로 적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면서 웃는다.
김 감독과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순전히 우연으로 시작됐다. “장기수 분들을 모셔오려고 하는데 트럭 좀 빌리자”는 송경용 신부의 부탁을 받고서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따라나선 것이 1992년 봄이었으니. 가슴에 적갈색 수인표를 달고서 0.5평의 감옥에서 30년 넘게 버텼던 백발 청년들과의 첫 만남을 김 감독은 “무섭고 조금은 두려웠다”고까지 했다(<씨네21> 387호).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 김 감독은 카메라에 오롯이 담긴 그분들의 결기야말로 진정 자신을 지켜준 보호막이 아니었을까, 하고 회고한다. 그들은 김 감독에게 도대체 무엇을 전해준 것일까.
-올해 초 편집에 들어가면서 담배를 다시 피웠는데. 이젠 끊어야 하지 않나.
=안 그래도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딸한테. 시사회 끝나고 나서 끊는다고 해놓고 왜 약속 안 지키냐고. 아직 시사회가 덜 끝났다는 변명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10년의 기록을 마무리하고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궁금하다.
=믹싱을 끝내고 나서 서른 시간 정도 쭉 잔 것 같다. 그게 8월 말인 텐데. 그뒤로는 야마가타영화제 보내려고 자막 만들고, 또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다듬고 그랬으니까 쉬진 못했지.
-편집하느라 애먹는다고 했다. 가닥을 잡기 위한 구성의 원칙이 있었나.
=조창손 선생과 함께 남파된 팀에 관한 기록을 시작으로 비전향 장기수들의 전향, 송환에 관한 이야기로 진행하되 중간에 그걸 지켜보면서 느꼈던 순간의 감정들하고 남북한의 정치 맥락을 끼워넣으려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균형이었는데. 하나는 조창손 선생을 중심으로 인물들을 편집하기로 한 원칙과 좀더 많은 장기수 분들을 등장시키고 싶다는 욕구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했고. 나의 주관성과 객관적 사실들간의 균형, 표현 수위에 대한 균형 등도 고민스러웠다.
-이전에 장기수 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장 고민스럽다고 했다. 내부 시사를 했을 텐데.
=북한 식량난을 거론하는 부분이나 마지막에 북한의 선전 화면들을 삽입한 것은 불편해할 듯해서 우려했다. 사람에 따라서 반응이 편차가 있긴 한데, 대체적으로 납득해주는 분위기였다. 좋아하진 않지만 양해해줬다고 해야 할까. 정치적 언급보다는 휴먼 베이스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에는 다들 공감을 해주었고. 푸른영상하고 활력연구소쪽 시사 때에는 후배들이 좀 구체적인 비판을 해주길 기대했는데. 다들 할아버지들하고 관계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 좋다고만 하더라고. 단점이 있지만 다들 세월에 눌려서 말 못한 것이겠지. (웃음)
-개인적인 상황을 묶어 92년의 상황을 전하는 첫 장면의 내레이션은 장기수 분들과의 오랜 인연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처럼 보인다.
=당시 푸른영상을 만들면서 프로덕션이냐 제작집단이냐 하는 고민들이 많았다.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직업으로서 해야 하는 거라면 먹고살아야 하는 건데. 방송용 프로그램을 따서 수지를 맞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고. 개인적으로 당시 제작집단의 성격을 지켜야 한다는 쪽이었지만, 나도 여러 수익사업들을 대하면서 이거 한편 하면 6개월 먹고사는데 하는 고민이 없지 않았지. 애가 둘이 생기니까 (세상이) 좀 뜨거운 줄 알겠더라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 많았던 시기에 할아버지들을 만났고 힘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2년 전 입국이 급작스럽게 불허되어서 평양을 못 가게 됐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좌절 상태였거든. 그런데 조창손 할아버지가 인편에 들려보낸 카메라를 향해서 날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때도 힘을 낼 수 있었고.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분들의 의지가 삶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준거틀이 된 거지. 젊을 때의 이상이나 정열을 회유, 협박, 폭력에도 불구하고 소실시키지 않았으니까. 그건 내 작업에도 해당하는 것 같고 누구에게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점일 거다.
-<조선일보> 기자가 장기수 분들에게 칼 포퍼의 말을 인용해서 늙어서까지 마르크스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이는 어리석다고 말하는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인가.
=의도적으로 촬영한 건 아니고. 그냥 괜히 왔다가 걸린 거지. 그 말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해주니 나로선 고맙지.
-전과 달리 내레이션을 많이 썼는데.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 내레이션이 줄어든 것은 왜 그런가.
=전반부는 10년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내레이션은 그걸 엮는 고리로서 사용한 것이고. 후반부는 인물들의 표정이나 간단한 질문을 통해서도 설명이 어느 정도 된 것 같았고. 앞이 다소 직접적이라면 뒤는 덜하지.
-장기수 하면 다들 똑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인물들의 구체성이 살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김선명 선생만 장기수인 줄 알잖아. 그래서 편집하면서 내 작품에서만큼은 김선명 선생보다 안학섭 선생이 더 많이 나오도록 했다. 김영식 선생 같은 경우도 이번 계기로 팬클럽을 만들어야 한다 뭐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웃음) 방송에서 다룬다면 장기수라고 통칭해서 다루거나 단일 주인공을 내세웠겠지. 근데 내가 봤던 장기수 분들은 다 다르거든. 더 가깝게 느껴지는 분도 있고.
-반공드라마인 의 일부 장면을 넣은 것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비튼 것이나 요즘 젊은 관객을 위한 배려처럼 보인다.
=나한테 간첩은 007에 나오는 스파이 아니면 무서운 사람이었어. 근데 인터뷰 중에도 나오지만 간첩이 너무 허술하게 잡혀. 배고파서 밥을 얻으러 왔다가 잡히고, 뜻대로 안 됐는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게 전부고. 내가 너무 틀렸다는 걸 안 거지. 그러면서 냉전 상황에 대한 언급이 필요해졌는데, 요즘 세대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잖아. 그래서 내 머릿속에 간첩의 이미지가 애초 왜 그렇게 고정됐나를 좀 재밌게 보여준 거야. 또 반공교육을 받은 나와 선생들과의 차이점이 부각될 수 있기도 하고. 사실은 이승복이나 김신조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북으로 가신 분들께 보여드릴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을 텐데.
=안 그래도 몇 군데 물어봤지. 평양에서 상영하면 별 문제 있느냐고. 의외로 긍정적이더라고. 그게 안 되더라도 테이프라도 전해드려야 하는데. 그게, 아직 불법인가? (웃음)
-얼마 전 야마가타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아. 참가자들이 따로 놀기 쉬운데 커뮤니티를 보는 듯했거든. 영화제쪽이 마련한 아이디어나 배려에 감탄했어. 예를 들면 아침체조에 관한 10분짜리 굉장히 재밌는 다큐가 있는데 아침마다 게스트들을 대상으로 실제 그 작품을 틀어놓고 아침체조를 하는 거야. 활기찬 영화제인데, 예산문제 때문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돌고 그래서 안타깝지.
-해외 작품들과 우리 작품들을 비교한다면.
=주관적 느낌을 드러내는 작품이 많았는데. 이제는 아예 오테르(Auteur) 다큐라고까지 부르더라고. 그래선지 나랑 같이 심사한 분 중 한분은 연출자와 찍히는 대상의 관계가 의심되고 감독 태도가 불성실해 보이면 가차없이 잘라버리더라고. 등장인물이 너무 고통스러운데 지나치게 많은 앵글을 사용하거나 그런 경우 있잖아. 우리 작품은 다섯 작품이 출품됐는데, 수준은 상위권이야. 다만 관계 맺기에서 상호 액션이 잘 안 느껴져. 주관성을 노출시키는 방법도 좀 서툴고.
-부산영화제 때 독립다큐와 방송과의 연계방안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는데.
=한때는 방송사에서 독립다큐를 무시했지. 액티비즘의 일종이라는 오해도 있었고, 기자재가 부족해서 완성도가 담보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 보급으로 그런 문제는 해소됐고, 또 영화예술의 일부라는 공감대도 형성된 것 같아. 다만 방송쪽에서 끌어오고 싶어도 환경이 자유롭지 못해 편성에 어려움이 있는 건데. 2∼3달 정도면 해소 방안이 마련될 것 같아. 독립다큐가 도약기를 맞는 셈인데, 이게 독립다큐 활성화에 기폭제가 되려면 정부쪽에서도 예술성과 공공성을 모두 아우르는 주요 장르라는 관점에서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마인드가 필요해. 지원도 그런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고, 그래야만 다큐전용관도 가능할 테고.
-내년 3월에 <송환> 개봉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키네코 하려면 최소 6천만원은 드는데. 그래서 영진위에 배급지원 신청을 했고, 선정이 되긴 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것 아닌가 몰라. 믹싱은 물론이고 마케팅도 해야 하니까. 근데 경험이 없잖아. 인디스토리쪽에 맡겨놓고 가만있어도 되는 건지. 요즘은 정말 기획이나 마케팅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니까. 비상이라고.
-납북자 가족들이 항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봐주시면 영광이지. 문제제기를 하면 답변을 할 거야. 문제 삼아주면 나로선 고맙고. 관객층이 넓어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