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뉴욕영화제에서는 미국영화들이 단연 강세를 보였다. 지난 10월3일부터 19일까지 열린 제41회 뉴욕영화제에서는 <미스틱 리버>와 <엘리펀트> <전쟁의 안개> <브라이트 리브스> 등 미국 작품들에 관심이 집중됐다. 총 21개국에서 출품된 26편의 장편영화와 15편의 단편영화들이 17일간 소개된 이번 영화제에는 10월 중 개봉예정이었던 <미스틱 리버>와 <엘리펀트>에 시선이 모였으며, 이 작품들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에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전쟁의 안개>와 또한 평론가들과 관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1988년 <버드>로 처음 뉴욕영화제에 선정됐으며, 1996년 ‘필름 소사이어티 오브 링컨센터’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스틱 리버>가 오프닝 작품으로 선정돼 숀 펜, 팀 로빈스, 케빈 베이컨, 로라 리니 등 호화 캐스트와 함께 레드 카펫을 밟았다. 구스 반 산트 감독 역시 10월24일 뉴욕과 LA 등지에서 개봉된 <엘리펀트>를 홍보하기 위해 캐스트와 프로듀서, 촬영감독 등과 함께 대식구를 거느리고 영화제에 참석했다.
이처럼 오랜만에 스타들과 유명감독들로 북적거린 뉴욕영화제는 지난 몇년간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올해로 41년째 맞은 이 영화제는 2001년에는 9·11 테러로, 2002년에는 테러 이후 맨해튼 다운타운의 경제적 복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된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 때문에 된서리를 맞은 것. 특히 2001년엔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의 참신한 기획 의도와 비교돼 뉴욕영화제는 ‘한물간’, ‘구태의연한’ 영화제라는 빈정거림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올해 뉴욕영화제는 어느 때보다 탄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작품성 있는 미국 영화 외에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 개인공헌상을 받은 <좋은 아침, 저녁>과 최우수 신인연기상을 받은 <라자>,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야만족의 침략>, 자파르 파나히의 <크림슨 골드>, 줄리 베르투첼리의 <오타르가 떠난 뒤>,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된 클로드 샤브롤의 50번째 작품 <악의 꽃>등이 미국에서 첫 소개됐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은 미국 내 개봉 일정이 내년으로 연기돼 출품된 다른 미국 작품들처럼 기대됐던 오스카 ‘버즈’(Buzz)는 얻지 못했다. 이 밖에도 홍콩의 , 대만의 <안녕 용문객잔> 등 아시아 최신작들을 비롯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00주년 기념 회고전과 잊혀진 중국계 할리우드 배우 애나 메이 왕의 무성영화 <피카딜리>가 복구된 뒤 미국 첫 상영되기도 했다.
또한 뉴욕영화제의 일환으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이 10월4일부터 11월5일까지 링컨센터에서 개최되고 있다. 이번 회고전은 뉴욕영화제를 주관하는 ‘필름 소사이어티 오브 링컨센터’와 <뉴욕타임스>, 일본 정부가 공동으로 기획한 행사. <도쿄 이야기>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초> <늦가을> 등 36편이 소개되고 있다. 오즈 감독은 뉴욕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그의 작품 중 <어느 가을날 오후>가 제1회 뉴욕영화제에서 상영돼 미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뉴욕영화제에서의 상영은 오즈 감독의 작품 중 대표작들이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미국 내에서 일반 개봉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뉴욕 영화팬들은 정작 뉴욕영화제 출품작보다 오즈 감독의 회고전에 더 큰 관심을 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클로드 샤브롤의 50번째 작품 <악의 꽃>(왼쪽)과 메이 왕의 무성영화 <피카딜리><오른쪽)
영화사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잊혀진 중국계 할리우드 배우 애나 메이 왕의 무성영화 <피카딜리>가 복구된 뒤 이번 영화제를 통해 미국에서 첫 상영된 것도 기억할 만한 사건. 작곡가 닐 브랜드의 음악이 라이브로 곁들여져 상영된 이 작품은 1929년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당시 같은 타입의 배역만을 요구하던 할리우드에 식상한 왕이 선택한 ‘돌파구’ 영화다. 재즈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왕은 그릇닦기를 하다가 나이트클럽 주인의 눈에 들어 일약 캬바레 스타가 되는 쇼쇼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번 가을 3편의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며, 내년 1월에는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그녀가 출연한 대표작 7편을 회고전으로 상영 계획이어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 영화제에서 또 하나의 관심거리는 살바도르 달리와 월트 디즈니 합작 애니메이션 <데스티노>였다. “기이한 만남”으로 출발한 이 작품은 1945년 제작 도중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중단됐다. 이후 애니메이션계에 전설처럼 이야기로 전해지던 이 작품은 달리의 스토리보드 원본을 바탕으로 한 디즈니사 파리지점의 애니메이터들의 노력으로 5분짜리 단편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이 작품은 <뉴욕타임스>로부터 “차밍하면서도 놀랍고, 달리의 천진난만한 유머와 디즈니의 로맨틱한 노션이 담겨진 수작”이라는 평을 얻었다.
뉴욕영화제는 칸, 베니스, 베를린, 토론토 등 페스티벌에 출품된 작품 중 우수작 20여편만을 선별한다. 뉴욕 골수 영화팬들과 평론가들 말하자면 뉴욕시 영화 엘리트들을 위한 행사. 비즈니스가 아닌 ‘하이 아트 쇼케이스’로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영화제는 그렇기 때문에 뉴욕에 적을 둔 대표적인 평론가들과 영화 관계자들이 가장 귀하게 아끼는 ‘보물’ 중 하나다. 지난 40여년간 1천여편의 작품들이 뉴욕영화제를 통해 소개됐으나, 한국영화는 지금까지 4편만 선정됐었다. 1988년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2002년 임 감독의 또 다른 작품 <취화선>,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등이 바로 그 작품들. 올 행사에는 한국영화가 한편도 선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