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영화 전문배급사 청어람 대표 최용배
2003-11-05
글 : 이영진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배급은 영화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

올해 배급시장에서 청어람의 약진은 눈부시다. 이건 공치사도 사탕발림도 아니다. 수치가 말해준다. 영화진흥위원회가 9월까지 흥행 통계를 바탕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청어람은 <싱글즈>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등의 삼두마차를 앞세워 시네마서비스, CJ에 이은 ‘넘버3’의 자리를 차지했다. 살림을 차린 지 겨우 2년. 게다가 한국영화만을 배급하는 이 조그만 배급사가 할리우드 직배사를 포함하여 덩치 큰 배급사들을 제친 저력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죽어도 좋아>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선택> <여섯개의 시선> 등 작은 한국영화까지 도맡아 배급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지난 9월 플레너스(주)시네마서비스의 품에서 독립한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를 만나 물었다.

<선택>에 이어 <여섯개의 시선>도 배급을 맡았는데, 스크린을 따내는 것부터 힘든 영화들 아닌가? 결정의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가 좋다. <선택>은 세번 보면서 세번 다 울었다. 가족들과의 면회 시퀀스에서는 특히. 되게 가슴에 와닿더라. 홍기선 감독이 오랫동안 어렵게 만드신 영화인데 극장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으로 묻히면 되나. 내 능력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다면 보람있겠다 싶었다. 큰 한국영화들 사이에 있는 작은 영화들도 조화롭게 잘 배급해야 한다는 게 우리 방향이기도 하고.

<여섯개의 시선>의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해서 여섯명의 감독들이 최 대표가 아니었다면, 이라고 치사를 돌리던데. 쟁쟁한 감독들 아닌가. 그런 감독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를 내가 배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한국영화’ 전문배급사라는 타이틀에 잘 부합하는 선택이라고 본다.

제작을 겸하고 있는데. 혹시 추후 감독 섭외를 위한 사전 투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 계산은 해본 적 없는데. 물론 그런 계기나 기회가 될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하겠지만. 사실 <여섯개의 시선>은 <씨네21> 기획기사를 보고서 알게 됐는데. 거기 실린 국가인권위원회 남규선 과장의 기획 배경을 보고 감동받았다.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남들 나라에서 받고만 살았던 우리도 돌려줄 수 있겠구나. 한국의 문화 상황과는 언밸런스하긴 하지만, 어쨌든 세계 많은 인권단체들에 격려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멋있고 뜻깊어 보였다. 그때부터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언젠가 정재은 감독한테서 이 영화의 P&A 비용이 없어서 개봉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우리가 비용을 대겠다고 한 거다.

<여섯개의 시선>은 대중적 반응을 고려해서 여섯 감독들의 에피소드를 배치하는 데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임순례 감독의 <그녀의 무게>를 제일 앞으로 옮겨왔다. 관객이 혹시 인권영화라고 해서 지레 재미없을 것이라는 오해를 할까봐 미리 안심시켜주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 임 감독은 앞으로 코미디 시나리오 많이 받으실 거 같다. (웃음)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감동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마지막에 놨고. 그리고나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사정>, 상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 일종의 공포버전이라고 할 만한 <신비한 영어나라>, 가장 화려한 배우들이 나와서 가장 편안한 박광수 감독의 <얼굴값> 등을 중간에 배치했다. 감독들의 각기 다른 스타일이 묻어나고 장르 또한 다양하고 에피소드마다 나름의 고소한 재미가 있다.

<선택> <여섯개의 시선>의 배급은 올 여름 <싱글즈>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등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게 가능하게 해준 측면이 있다. 큰 영화들을 배급하고 나면 잉여배급력 같은 게 생긴다. 그것을 여타 한국영화들이 개봉할 수 있도록 환원하고 싶었다. 극장 관계자들 입장에선 이런 영화들을 가지고 가면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 (웃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데는 두 영화가 지닌 재미와 감동뿐만 아니라 앞의 영화들의 힘이 도움이 됐다. <선택> 이후에 극장쪽에서도 먼저 같이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어서 <여섯개의 시선>은 출발이 좋다. 하고 싶었던 영화를 풀 수 있는 현실적 조건들이 마련되어서 다행이다.

<여섯개의 시선>의 개봉 규모는 얼마나 되나. 일단 30개는 기본으로 간다. 대중성이 있지만, 비교적이다. 절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극장에서 사전에 확신을 갖기란 쉽지 않겠지. 관건은 마케팅인 듯하다. 재미에 더해서 건강하고 유익한 교육용 영화로 포장할 참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관변영화나 선전영화로 오인받으면 큰일이다. 11월7일에 국가인권위원장이 호스트로 주최하는 VIP시사를 비롯해서 몇 가지 시사회 아이템을 마련해놨다. 벌써 어떤 정부부처에서는 개봉날 단체관람을 하겠다는 곳도 있고.

올해 <죽어도 좋아> <동승> 등의 영화들도 배급했다. 배급사로서 일정한 물량확보 측면도 있겠지만, 와이드 릴리즈가 일반화된 현 배급시장 아래서 작은 영화들도 배급전략만 잘 세우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서 계속 욕심을 내는 것 같은데. <묻지마 패밀리> 때 업계 사람들이 별게 다 되네, 하는 분위기였다. 절대적 수치로 본다면 지금이야 기억나지 않는 영화겠지만 첫주에 박스오피스 1위를 하는 걸 보면서 일단 한번 해보자고 덤볐던 나도 놀랐다. 처음에 동숭아트센터 1관, 씨티극장의 시사회용 스크린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늘려갔는데, 얼마 지나니까 큰 극장에서도 왜 우리한테는 안 물어봐 그러더라. 전국 100개관까지 자가발전하는 걸 쭉 지켜보면서 느낀 게 많다. 배급이라는 게 안 될 영화를 되게끔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고 증폭시킬 순 있다. 그걸 보는 게 즐거웠다.

<죽어도 좋아> <동승> 등은 흥행성적이 만족스럽진 않았을 텐데. <죽어도 좋아>는 일반공개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던 작품이다. 스코어도 이 영화의 규모를 보면 나쁘지 않다. 저예산 비주류영화들의 제작비와 스코어를 훑어보면 알 것이다. <동승>은 마케팅의 힘이 상당했다고 생각한다. 주경중 감독과 홍보사쪽에서 개런티 대신 인센티브를 받겠다, 대신 배급사가 이 정도 스크린 규모는 보장해달라고 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주위에서는 다들 <동승>이 무슨 영화인 줄도 몰랐다. 감독과 마케터와 배급사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경우인데, 과정이나 결과나 모두 만족스럽다.

회사의 규모에 비해서 인적 네트워크 확보가 탄탄한 느낌이 있다. 기동성도 돋보이고. 돈이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웃음) 개인적으로 돈 모아서 뭘 한다라는 건 순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돈을 모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먼저 아닌가. 자금은 조금씩 늘려가면 자연스럽게 커진다고 본다. 기동성이라고 했는데 그건 내 생각엔 강우석 감독한테서 배운 것 같다. 할 것은 빨리 서둘러서 하고 안 할거면 빨리 접고. 하려고 맘 먹으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다가도 안 되면 운이 아닌가보다, 라고 빨리 딴 걸로 돌리는 것들.

최근 청어람의 지분 구성에 변화가 있었는데. 플레너스가 소유했던 지분 50%를 내가 인수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지분이) 60%가 됐고, 무한투자가 가지고 있었던 40%를 일단 아이픽처스가 인수를 해서 거기가 40%다. 시네마서비스 자매회사로 시작했는데, 이젠 청어람 2기가 시작된 셈이다. 시네마서비스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를 한다. 새로운 파트너들과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점도 있고.

양쪽 모두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결과인가. 사업구조 중복이라는 게 계열분리의 공식적인 사유다. 플레너스쪽에서는 청어람에 자금을 대줘야 하는 상황도 올 수 있는데, 사업부문이 중복되는 회사를 동시에 끌고 가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전에는 시네마서비스가 배급하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넘치는 영화를 우리가 배급했는데, 그동안 시네마서비스의 배급력은 더욱 커졌고. 또 투자를 하면 배급도 하는 패턴이 있는데, 플레너스(주) 시네마서비스가 투자를 하고 우리가 배급하는 건 특별한 케이스가 돼버리니까. 특별한 일은 자주 일어나면 좋지 않은 것 아닌가.

청어람의 적정 라인업을 연간 7편 정도로 얘기했었는데. 올해는 이미 넘치지 않았나. 많이 얘기했다가 못 맞추면 불성실하게 일을 했거나(웃음)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내가 자신있는 숫자를 얘기한 것이다. 7편이라는 숫자는 아마 그 시점에 이미 확보가 된 작품들 개수일 거다. 연간 12편 정도가 딱 맞다고 생각한다. 자체 제작은 3편까지 하고 싶은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효자동 이발사>를 직접 제작하면서 뭔가 달라진 게 있을 텐데. 제작자를 겸하면서 생활 패턴도 달라졌을 것이고. 할 일이 많아졌으니까. 지금 30% 정도 찍었는데, 제작하면서 술을 끊다시피 했다. 최근 4개월 동안 나랑 술 제대로 마셔본 사람은 없을걸. 밤 늦게까지 회의도 해야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 하고. 뭐든 처음하면 능숙하진 못하니까. 경험했던 거라면 빠르고 현명한 판단이 뒤따를 텐데. 뭣보다 가장 힘든 건 제작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을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과 중압감인 것 같다.

평소 하고 싶던 일이라 마음만은 즐거울 텐데. 제작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옆에서 많이 부러워했는데. 막상 되고 나니까 여러 편 만드는 제작자가 되고 싶다. (웃음)

추후 라인업이 어떻게 되나. <아빠하고 나하고> <가능한 변화들>이 연내에 잡혀 있고. 내년 라인업 중 확정된 건 <고독이 몸부림칠 때> <마지막 늑대> <효자동 이발사> <거미숲> <바람의 파이터> 등이다. 봉준호 감독 작품이 2004년 8월쯤 들어갈 것 같고. 박종원, 김태용·민규동, 그리고 몇몇 신인감독들의 작품도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올해까지 채우면 영화쪽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되는데. 한국영화의 빠른 변화를 몸으로 느낀 적이 있다면. 시네마서비스에서 처음 한국영화를 배급할 때는 어려움이 컸다. 외화 위주의 시장에서 한국영화를 배급하려고 악도 많이 질러댔는데, 성질도 많이 버렸다. 홧병이 도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시네마서비스 5년 중 앞의 2년 반이 그랬다면, 그 이후에는 하루도 시네마서비스의 영화가 극장에 안 걸려 있는 적이 없는 시기였다. 우리가 배급날짜를 정하면 그 날짜 중심으로 다른 영화의 배급날짜가 정해졌고. 시장점유율에서 직배사들을 다 제쳤고. 엄청난 반전이었다. 과거엔 나보고 배급을 왜 하느냐, 별볼일 없는 한직 아니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인식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그때는 나도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다. 나중에 프로듀서를 할 건데, 배급 경력이 혹시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심지어 크레딧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했고, 명함에도 제작·배급 최용배라고 새길 정도였다. 그런데 그 동안에 영상원에도 배급 관련 과목이 2개나 생겼고, 배급팀 직원을 뽑는 데도 경쟁률이 몇백 대 일씩 되더라.

중국 베이징에 새 오피스를 개설했다고 들었는데. 개발 중인 프로젝트 중 중국쪽과 결합해야 하는 작품이 있나.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고 하는 거다. 현재는 한 국내 메이저 회사의 영화들의 개봉, 비디오 판권 등에 대한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중국에서 제작하려면 어떤 모델이 합리적인가를 연구하고 있다. 중국쪽은 WTO 개방과 함께 영화쪽도 순차적인 개방 계획들을 갖고 있으니까. 그쪽 일은 유영호 중국사업팀장이 맡고 있는데 전에 삼성영상사업단에서도 중국쪽 영화비즈니스를 맡았던 유능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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