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빈틈에서 많은 것들이 보여요,<여섯개의 시선>의 지진희
2003-11-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지진희는 길고도 추운 하루를 보내고 찾아왔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났다는 그는 서울보다도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을 의정부에서 열네 시간 넘게 <대장금>을 찍었다고 했다. 걱정이 됐다. 너무 피곤하진 않을까, 차가운 캔커피를 마다하진 않을까, 벌써 한밤인데 서둘러 가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나 쓸데없는 소모였다. 지진희는 “너무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다 먹을 수 있어요”라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커피와 함께 식어버린 샌드위치 한 조각마저 깨끗하게 먹어주었다. 두번 끓인 음식을 싫어하면서도 앞에 있는 건 맛있게 먹는다는 남자. 분명하지만 인간적인 그 습성이 배우 지진희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곡절 많았던 첫 번째 영화 <H>를 찍으면서 “말수가 적고 애늙은이처럼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조승우의 마음을 열어놓았고, 촬영이 끊어진 틈을 타서 염정아에게 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스스로 연기를 못했다고 말하는 그 무렵의 지진희는 그런 식으로 <H>의 세 기둥 사이에 긴장어린 깊은 느낌을 끌어들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연기만으로는 채울 수 없을 그런 느낌을.

스물여덟, 아홉 무렵에야 연기를 시작한 지진희는 연기하는 방법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디션 때문에 만난 박광수 감독과 황인뢰 PD는 그가 느낌이 좋은 배우라는 사실을 믿어주었지만, 언제까지고 이미지만으로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시도했던 영화 출연이 무산된 것도 부족한 연기력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진희는 드물게 선이 굵은 외모를 이용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미묘하게 변해가는 감정도 드러낼 줄 아는 배우가 됐다. “가르치면 누가 못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설명이지만,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부족한 무언가는 그의 두 번째 영화 <여섯개의 시선>을 이야기하면서 채워지기 시작했다.

<여섯개의 시선>은 여섯명의 감독이 인권을 테마로 각자 단편영화 하나씩을 연출한 옴니버스영화다. 지진희는 그중에서 박광수 감독이 만든 <얼굴값>에 출연했다. 영안실에서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운 남자는 자동차를 몰고 나가다가 예쁜 주차장 관리직원에게 치근덕거린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그는 ‘얼굴값’ 운운하면서 심한 말을 내뱉다가 이 공간이 뭔가 음울하고 섬뜩한 기운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짧은 영화, 평범한 캐릭터. 지진희는 운전석에만 앉은 채 굴곡을 타야 하는 이 이름없는 남자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웬만하면 음주운전을 하거나 대리운전을 부를 텐데, 뭔가 독특한 구석이 있구나 했어요. 이 남자가 차에서 잠을 깨자마자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매만지거든요? 외모에 상당히 신경쓰는 사람이라는 거지. 이 남자는 아마 한번도 여자한테 숙이고 들어간 적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길고도 세밀한 주석이 이어졌다. 그 말을 듣다보면 빽빽하게 메모가 들어찬 시나리오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분석하는 그의 습관은 외부에만 적용되진 않는다. 지진희는 그 자신을 들여다볼 때도 냉정하고 가차없다. “항상 분석하니까 내 단점이 뭔지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아는 것과 고치는 것은 다르잖아요.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많아요.” 그러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아주 조금씩만 바꾸는 포즈와 달리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씩 웃는 얼굴도 모두 달랐다. 그는 분석하는 배우지만, 본능적인 감각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배우이기도 한 것이다. 말보다는 공기를 타고 오는 느낌을 믿는. 지진희가 대사 적은 짐 자무시의 영화를 좋아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아직도 짐 자무시 좋아하세요?”라는 무심한 질문에도 그는 눈을, 정말로, 반짝 빛내면서 또다시 끝나지 않을 추억을 늘어놓았다. 그는 <천국보다 낯선>을 공짜표가 생겨서 우연히 보았다. “일단은 구도가 너무 완벽했어요. 그런데 대사가 정말 없더라고요. 한마디 하고 또 한참 있다가 한마디 하는데, 그 사이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오르는 거예요. 그렇게 많은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뻤어요.” 눈을 감고 헬기 소리만 들으면서 <지옥의 묵시록>에 빠져들었던 중학생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진희는 그런 자신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어요. 보기만 해도 숱한 느낌이 있는데, 다들 들리는 말에만 신경을 쓰고 사니까 그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나 모두가 잃어버렸다면, 홀로 간직한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지진희가 “십년 뒤에는 나아지겠지”라고 느긋하게 마음먹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순간의 물결에서도 자잘한 물방울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걸 버리고 조급하게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 서른을 넘긴 그는 그런 사람이다. 서두르지 않고, 자신이 지금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다. 너무 활짝 웃으면 주름이 보인다는 사진기자의 충고에, 지진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마저 웃었다. “주름이 좀 보이면 어때”라면서. 그는 주름이 보여도 괜찮을 것 같다. 많은 걸 품은 사람은 세월의 흔적으로 주름말고도 많은 걸 내보일 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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