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난 박사 논문을 쓴답시고 허덕대고 있었다. 한편의 논문에 그 무엇인가를 걸고 어느어느 대학교수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내 인생을 팔려고 하고 있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가빠하면서도 아이 키우는 것과 시집살이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모두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단련시키고 강화해주는 예방주사와 같은 것이라고 위안하며 살았다.
그러다 그 영화를 만난 것은 어느 청명한 가을날 오랜만에 호젓하게 슬그머니 찾아간 한적한 영화관 스크린에서였다. 그 즈음 나는 안팎으로 밀려오는 분주함을 혼자서 잠깐씩 해소하는 방법으로 영화관을 찾는 것이 낙이었다. 그날도 작은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집 앞의 번화가에서 커피를 한잔 하고서 영화관으로 들어섰던 것 같다. 사실은 아무 기대도 없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서는 내 몸 전체가 숨은 듯 착각을 하듯이 그 숨가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심지어 내가 사는 목표라고 정해놓은 것까지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꾸역꾸역 가고 있는 내가 구역질날 때마다 커다란 영화관 스크린 속으로 밀어넣어서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 싶었는지도.
그곳에서 난 친구를 찾아가는 아마드를 만났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는 교실, 혼나는 아이, 그리고 잘못 가져온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려고 애쓰는 그 아이를 만났다. 숙제를 하다 말고 바람에 휘날리는 빨랫감들을 바라보다가 친구를 떠올리고는 이웃 마을의 친구가 사는 곳을 찾아가는 아마드는 낯선 마을의 꼬불꼬불 골목길을 해가 질 때까지 헤맸지만 끝끝내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어두운 밤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선생님에게 혼나게 될 친구를 안쓰러워 하는 아마드와 숙제를 하지 못한 친구가 있었고 그 사건은 아무리 크게 확대돼봐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잠깐 매를 맞든지 야단을 듣든지 하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영화에서의 그 담담한 일상의 사건 속에서 무엇인가 가슴속에 잔잔하게 차오르는 것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이의 눈동자였다. 슬프게도 난 아이가 가지고 있는 순진함과 진지함과 티없는 걱정거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거창하게 추상적인 개념들을 나열하면서 인생과 학문의 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양 가장해야 했고 그렇게 가장된 중요한 문제들 뒤로 잔잔한 걱정거리들은 언제나 앞으로 나가려는 나의 발목을 잡는 방해꾼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마드가 친구를 찾아 올라가는 언덕길의 상형이었다. 그 언덕의 꼭대기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쪽에서 보면 올라가는 길은 그리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아마드가 그 길을 따라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난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멍해졌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 전체가 마치 장면의 한 컷처럼 내게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그 길은 언덕 아래에서부터 꼭대기의 나무까지 지그재그로 난 비탈길이었다.
난 그때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난 그 방법을 몰랐다. 젖을 먹일 때와 죽을 먹일 때와 밥을 먹일 때의 구분이라든지, 똥오줌을 가릴 때는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특히 아이가 아프면 가장 당황스럽게도 밤낮을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저 어두운 밤, 깊은 숲속을 더듬거리며 한 발자국씩, 때로는 헛디디지만 때로는 모르는 자신감에 마구 달려보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무서워져서 옴짝달싹도 못하다가를 반복하면서 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박사 논문’이라는 가상의 목표가 나를 짓누르면 아이들을 키우는 것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 되어서 덮쳐왔다. 나는 솔직히 그러는 내가 무서웠다.
그때 영화의 그 장면은 바로 어두운 산을 올라가는 내 주위로 갑자기 조명탄이 터지면서 난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영화는 일상의 걱정거리들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하고 살지도 못하는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마치 어둔 밤길에는 이 길로만 똑바로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환한 낮이 되면 목표점과는 상당히 거리나 각도가 빗나간 채로 가고 있는 나를 알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깊은 통찰을 주었던 것은 선명하다고 생각했던 목표조차 하나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마드의 눈동자와 산비탈길이 내게 보여주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비록 어디를 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가 나를 일으켜서 어디론가 향하게 하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방향의 무엇인가의 사건이 나를 달려가게 하리라는 것을. 잡다한 걱정 뒤로 사건들은 이어질 것이고 난 아마드처럼 순수하고 인정스럽게 그것들에 대처할 능력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길은 지그재그였고 아마드의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맑게 비어 있었다. 조명탄이 터진 듯이 분명하게 보였던 총체적인 언덕 사진에서 꼭대기에 있었던 나무 한 그루는 사실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었다. 언덕 너머로 또다시 그런 꼬부랑길이 있을 것이고 그 길들은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이니까. 그것은 그저 우리가 환상하고 상정한 숨가쁜 인생의 목표들이었다. 조명탄이 터지는 듯한 섬광으로 인생을 조명하는 것은 영화를 보러 들어와 앉은 나를 벗어나는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고 난 그저 어두운 밤길을 묵묵히 걷거나 달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삶의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내가 가장한 가상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왜 내게 그토록 무거운 짐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차피 삶은 그 본래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아마드와 같은 그 순수한 걱정만으로도 혹시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꼬불꼬불 언덕길이 언덕 너머 또 언덕 너머로 이어지듯이 일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텐데 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목표만을 염두에 둔 채 일상의 사건들을 따스하게 감싸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평상시라면 귀찮고 성가시다고 느끼던 저녁준비를 위해 기꺼이 반찬거리를 고민하면서 장을 보았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이렇게 생각하며 즐거웠다. 사는 것은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저녁밥을 짓는 것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