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위장이 텅 빈 듯, 섹스가 고플 때가 있다. 영국에 사는 두 남녀, 클레어와 제이가 그런 사람들이다. 슬픈 눈을 가진 남자와 지적인 열망을 숨긴 여자는 매주 수요일에 만나, 아무 말 없이 섹스를 나눈다. 이름도 대화도 필요없는 두 사람의 섹스는 발기된 성기와 체질하는 육신과 부스러기처럼 남아 있는 음모와 반쯤 말려올라간 콘돔을 맨살로 드러낸다.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과, 프랑수아 오종의 <시트콤>과 카트린 브레야의 <로망스> 등등 이제 유럽 아트무비 속의 섹스는 어쩌면 유행일지 모르지만, <정사>의 섹스야말로 건조하고 절절하다. 환상을 걷어낸 섹스는 물질화된 공허와 물질화될 수 없는 육신의 감촉을 동시에 전달해준다. 이 영화의 섹스는 그야말로 실제상황인 것이다.
모든 영화적 요소를 충돌시키다
정사에서 에릭 고티에의 촬영으로 이루어진 케리 폭스와 마크 라일런스의 육체에 대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오히려 그들의 육체를 롱숏으로 잡을 때와 똑같은 질감으로 다가온다. 파편화된 육체의 질감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로 멀리서 그들의 행위를 관망할 때와 비슷한 소름끼치는 고립감을 느끼게 만든다. 접혀지는 피부로 장식된 인간의 육체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베르톨루치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듯, 파트리스 셰로가 또 다른 영국 출신의 화가인 루시안 프로이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기도 한 루시안 프로이트는 미감 가득한 ‘누드’가 아닌, ‘네이키드 보디’ 즉 벗은 몸을 통해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잔인하리만큼 정직하게 노출했다. 마찬가지로 셰로는 정사에서 축축 처진 우리의 살갗들이 갖는 정서적 가치와 관계의 진원지로서의 몸을 직시한다. 바텐더인 제이나 연극배우 클레어 모두 수많은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끄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절절하게 상대의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늪 같은 관계의 공허함은 헤어진 아내 곁에서도 그녀를 만지지 못하고 고작해야 그녀의 팬티를 앞에 두고 수음을 하는 제이의 행동에서 절정을 이룬다(어쩌면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통한 셰로의 육체의 질감에 대한 성찰은 당분간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근작 <그의 형제>에서 죽어 가는 주인공의 육신을 정물화 그리듯 스케치함으로써 육체의 실체를 다시 한번 묘파했다). 피부와 주름, 부숭부숭한 털, 머리카락에 파묻은 손의 적막과 아무렇게나 똬리 튼 등의 자세까지, 영화 시작에서 제이의 육신을 훑는 고티에의 카메라는, 육체가 없다면 관계도 존재할 수 없다며 마치 현미경을 장착하듯 주인공의 육체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리하여 정사는 파트리스 셰로의 그 어떤 영화보다 미세한 감정적 떨림까지 잡아내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감각적인 생명력을 터득한다. 일례로 그는 섹스신이 아니라 오히려 제이가 자신의 두 아들과 목욕탕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낼 때 오직 그 기억에만 슬로모션을 준다. 그것은 너무나 행복한 과거라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기억이다. 게다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아내를 둔 제이와 앤디의 집안은 오히려 따뜻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파트리스 셰로는 모든 영화적 요소를 충돌시키고 역발상으로 배치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다.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것 같은 바(bar)나 버스, 기차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자 사는 제이의 집의 적막함을 충돌시키고,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하는 제이의 푸른 빛과 전형적인 런던 중산층 집안인 앤디의 황금빛을 충돌시킨다. 문만 열면 소음투성이인 런던의 길가에서 제이는 처음으로 클레어를 미행한다. 격렬한 정사가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따옴표라면, 들고 찍기로 찍힌 이 길거리 장면은 제이의 클레어에 대한 흔들리는 마음과 허물어지는 일상과 잡을 수 없는 소망, 꿈, 방향상실감을 숨겨놓는 괄호처럼 보인다.
런던, 깊숙이 자신의 욕망을 숨긴 도시
혹 당신의 삶도 그러한가? <정사>에서 모든 사람들은 몇날 며칠이 아니라 무슨무슨 요일로 삶을 헤아린다. 예를 들면 수요일에 친구를 만나고 토요일에는 해고를 당하고 화요일에는 극장에 오는 식이다. 이와 함께 <정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공간과 음악이다. 공간과 음악. 당연히 1969년부터 오페라 연출자로 일한 파트리스 셰로의 경력이 수렴되는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사>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메타포로 빛을 발한다. 제이는 가족을 떠나올 때 오직 존 레넌의 사진만을 가져왔고, 빌리 조엘을 싫어한다. 클레어는 제이가 모은 CD들에 관심을 보이며 격렬한 섹스로 빠져든다. 크래시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이 떠도는 정사는 오로지 영국의 뮤지션들로 철저히 채워져 런던의 에너지 넘치는 공기를 미묘하게 진동시킨다. 또한 두 사람이 격렬한 섹스를 나누는 제이의 아파트는 화장실과 함께 쓰는 클레어의 연극무대처럼 남루하고 비어 있다. 남자의 사적인 공간인 집이 여자에게는 공적인 공간이 되고, 여자의 사적인 공간이 남자에게는 공적인 공간이 되는, <정사>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런던 노동자 계급 버전을 연상시킬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여왕 마고>라는 230억원짜리 프랑스 코스튬드라마로 일약 유명해진 파트리스 셰로가 왜 하필 영국계 배우들과 함께 파리가 아닌 런던에서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하니프 쿠라이스의 원작 <나이트 라이트>의 배경이 런던이고, 셰로는 “너무나 포토제닉한 도시, 빨강과 녹색과 자주로 물든 런던의 색깔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말이다. 사실 약물과 크래시의 음악과 이층버스가 함께하는 런던에서 격렬한 섹스가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은, 다른 어떤 유럽 도시보다 런던이 무엇인가 깊숙이 자신의 욕망을 숨겨놓은 듯 느끼게 만든다. 한때 데니 보일이 보여준 스코틀랜드가 그러했듯이, 셰로가 보여주는 지금 여기의 런던에서 실재하는 모든 것은 신화나 낭만의 코러스가 아닌 현실의 파열음을 내면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늘 시끄러운 소음과 타인의 시선이 버글버글한 공적인 장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막상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혼자서 담배를 뻐끔거릴 뿐이다. 이 도시에서 그들은 정말로 무언가 삶을 잊을 만한 강력한 것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만약 파트리스 셰로가 다시 한번 파리에서 외로움에 지친 중년 남자의 탱고를 찍으려 했다면, 정말 이 영화는 ‘파리의 마지막 정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처란 삶이 주는 가장 깊은 문신
그리하여 반쯤 처진 여자의 젖가슴이 움푹 팬 남자의 옆구리에 안부를 묻는다. 한 때는 당당하게 자신의 여자를 휘감던 남자의 다리가 누군가의 손길을 원하는 여자의 어깨에 사그라들지 못하는 열망을 얹는다. 정사는 결국 35분짜리 리얼터치섹스에 관한 영화였던가. 하드고어가 B급영화에서 주류 공포영화 속으로 진입하고, 하드코어가 포르노에서 유럽 아트영화 속으로 진입하는 가운데, 벌거벗은 섹스라는 코드에 가장 민감한 감독들이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팻걸>과 <로망스>의 카트린 브레야나 <트러블 에브리데이>의 클레어 드니, <돌이킬 수 없는>과 <아이 스탠드 얼론>의 가스파 노에,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의 프레드릭 폰테인과 프랑수아 오종까지. 린다 윌리엄즈가 지적한 대로 정치와 섹스와 철학을 함께 엮어내었던 사드의 후예들답게 이들은 때론 금기를 깨는 철퇴 같은 섹스를 휘두르기도 하고 로망스의 허상을 폭로하는 섹스를 들이미는 등 천차만별의 뉘앙스를 신음섞인 인간의 몸짓에 부여한다(이 점에 있어서 출신 성분이 예외적인 감독이라면 <백치들>에서 바보들의 짓거리로 경량급의 혼음난교를 펼쳐 보인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 정도가 있을까).
그러나 파트리스 셰로는 이러한 일단의 프랑스 감독들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이고 육감적인 방식으로 섹스 액트(sex act)에 접근한다. 기이하게도 정사는 섹스를 통해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사는 여전한 소외와 익명의 섬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으로 육체적 관계를 탐구하지만, 결국 마지막 방점을 찍는 것은 육체를 통해 확인되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관계에 숙명적으로 따라붙는 ‘말의 불완전성’이다. 아무 말 없이 섹스를 나누며 시작된 둘의 관계는 처음으로 남자의 ‘집’에서 ‘말 다운 말’을 나눈 뒤 파탄에 이르른다. 아내의 부정을 알아챈 남편은 고작해야 아내의 연기 실력이 얼마나 한심한지 추궁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무감각하게 와서 재미를 보는 것’은 아니냐고 따진다. 나말고 누군가 있다는 게 정말 고통스럽다고 고백하며 두 사람 모두 한줄기 눈물을 흘리지만 이 소금물줄기는 오해와 불신으로 점철된 말의 위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사그라든다.
그래서 <정사>는 보면 볼수록 주인공들의 행위에서 멀어져서 그들의 소통 불가능성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그런 영화이다. 피와 땀이라는 체액으로 잔혹의 역사를 복원시켰던 파트리스 셰로는 다시 한번 <정사>에서 피부는 인간의 가장 좋은 옷감이며, 상처란 삶이 주는 가장 깊은 문신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기존의 연기가 에로티시즘의 후광을 두른 연기였을 뿐임을 여실히 깨닫게 만드는, <정사>는 육체가 존재를 증거하는 한바탕의 퍼포먼스이자, 정사는 여전한 배고픔이고 외로움이며,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약속하는 익명의 초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