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이 감싸고 도는 멕시코의 한 마을, 사춘기 소녀 프리다는 리비도와 이념이 폭발하는 디에고 리베라의 작업 현장을 부러운 듯 훔쳐본다. 그 무렵 그는 버스와 전차가 부딪히는 첫 대형사고로 온몸이 부서지며 첫사랑마저 잃는다. 몇년 뒤, 두손만 간신히 움직여가며 그린 그림을 들고 리베라를 찾아간다. 리베라는 그녀의 그림뿐 아니라 거침이 없는 그녀에게도 강한 매혹을 느낀다.
■ Review영화 <프리다>는 프리다 칼로의 예술세계로 접근하는 통로를 과감하게도 단 두 가지로 압축해놓았다. 연인 리베라로부터 거듭해 받게 되는 정신적 상처와 자신의 육신을 사정없이 공격해 극도의 고통과 장애로 몰아넣곤 하는 육체적 상처다. 혁명에의 의지만큼이나 원초적 본능으로 들끓는 리베라가 마침내 프리다의 누이까지 탐하는 현장을 목격한 프리다는 당연히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곧바로 캔버스로 분출된다, 는 식이다. 두 상황이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달리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또 프리다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면서 신체를 공격적으로 분해하고 헤집어놓는다. 그 자화상들은 사고로 산산조각난 몸이 가져다주는 프리다의 고통스런 현실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옮겨간 결과다(척추의 자리에 쇠기둥을 박아넣은 자화상에선 하얀 눈물이 흐르는데 작품으로 승화된 그의 모습은 그 순간에 스크린에 비친 현실의 프리다와 아주 닮았다).
이건 프리다를 해석하는 데 오류는 아닐지언정 굉장히 편의적인 방법처럼 보인다. 프리다의 화폭에 뿌려지는 도전적 이미지의 원천을, 그 아우라를 무척 좁혀놓기 때문이다. 방대한 고전을 마구 잘라 산뜻한 문고판으로, 단출한 개론서로 만든 것과 같은. 사회주의적 기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념적 발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외면하고 사적인 정서가 강한 그림만을 골라 대거 스크린에 등장시킨 것도 비슷한 효과를 낸다. 단, 작가의 피폐한 내면과 그의 예술세계가 단절적이었던 에드 해리스 주연의 <폴록>에 비하면 이건 상대적으로 굉장한 장점이다.
어쨌든 영화 <프리다>는 매혹적이다.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박은 상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프리다 칼로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영화의 연출기법으로 끌어들인 듯한 장면들은 특히나 매력적이다. 프리다에게 평생의 족쇄가 된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의 불길한 전조로 시작해 사고의 순간, 사지를 헤매면서 겪는 의식과 무의식의 고통, 병원에 누워 눈을 뜨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대표적이다. 미국 록펠러 재단의 벽화에 레닌의 초상을 넣는 바람에 모욕을 당하는 리베라의 좌충우돌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선 킹콩의 모습에 빗대는 장면은 재밌으면서도 리베라가 겪은 여정을 효과적으로 전해준다. 이 기행문에는 콜라주 기법도 동원된다. 여성감독 줄리 테이머의 장르를 뛰어넘는 입체적 연출 솜씨가 돋보이는 대목들이다(그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라이온 킹>으로 토니상 연출상을 받았고 지금은 오페라 <Grendel>을 준비 중이다).
프리다가 스탈린의 총구를 피해 자신의 집을 망명처로 택한 트로츠키와 사랑을 나눈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듯 그와 리베라의 연애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리베라는 섹스를 “형식적인 악수보다도 무의미한 행위”라고 치부하면서 정조라는 연애 규칙을 일관되게 무시해나간다. 프리다는 마치 리베라에 대한 보복처럼 양성애자로 맞서는 형세를 유지한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작품들처럼 현실과 맞서고 조롱하고 상처받지만, 긴 세월을 보내고도 결국 살아남는다. 그 절절하면서도 풍부한 열정을 샐마 헤이엑과 앨프리드 몰리나, 두 배우가 멋지게 보여준다.
:: 프리다 칼로의 예술세계
새로운 사유가 화폭에서 폭발하다
프리다 칼로는 우리 미술계에선 거의 신인과 다름없다. 그녀는 갑자기, 느닷없이 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는가? 아니, 왜 이렇게 가까이 곁에 머물 수 있는가? 그녀의 작업이 세인의 관심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여성적 시각을 회복하는 사회에서 늘 똑같은 방식으로 그래왔다. 70년대 미국의 미술계에서 페미니즘 논의가 하나의 문화비평적 시각을 견지할 때 그랬고, 우리 문화계에서 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여성주의 시각이 자리를 차지할 때부터 그녀의 작품들은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이미 그녀가 살았던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멕시코로부터 발송된 서신처럼, 영향을 끼치고 열정에 들뜨게 만들었으며 진보적 예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져다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던 멕시코 사회주의 혁명이 그 혁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때, 멕시코 미술계는 새로운 기운으로 꺼져가는 혁명의 불씨를 부둥켜안았는데, 남성적 힘이 튕겨져나갈 듯한 멕시코 르네상스기의 회화들 사이에서 프리다의 여성주의적 시각이 열어주는 사회적 관찰과 성찰의 내용들은 실로 혁명적인 예술의 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자칫 개인적인 관심사만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작품에서는 인간조건으로서 평등과 상호간의 관심이 가지는 다양한 비대칭적 관계 그리고 멕시코에 보내는 무한 애정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풍을 구사하는 데에는 그녀가 가지는 사회주의자로서 균형잡힌 성찰적 태도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자국(멕시코)의 현실을 직시하고 탈유럽화된 개인적 미의식(동시대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을 만나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에 의해 완성되어간다. 그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그녀의 삶과 작품에 보내는 애정은 뜨겁다. 프리다가 탈근대적 체계 안에서 완성시킨 작품과 지독한 여성주의적 사유와 세계관이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자 하는 지금의 현실적 요구와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런 아방가르드적 기질과 시대를 건너뛰는 혜안이 디에고 리베라라는 거대한 남성 화가를 만나고, 지도하고, 사랑하며 리베라답게 살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기술적 완성도에 치중하거나 새로운 쟁점에 기대어 작업하는 미술 중심적 사고가 대사회적으로 가지는 한계를 반성할 줄 알았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그녀를 리베라와 같이 때로 다르게 독자적인 예술가로서 스스로 존재하게 하는 이유인 것이다.이섭/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