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이 쓸고간 황폐한 미국. 아들을 자동차 사고로 잃고 실의에 빠진 자동차 업계의 대부 하워드(제프 브리지스), 가망없는 경마기수이자 무명 권투선수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빨강머리 기수 쟈니 폴라드(토비 맥과이어), 홀로 초원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비밀에 싸인 늙은 조련사 톰 스미스(크리스 쿠퍼) 그리고 작은키에 구부정한 다리를 가진 볼품없는 경주마 ‘씨비스킷’. 1938년 8월, 이들은 종국으로 치닫던 서로의 인생을 구원해줄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 Review“기념비적인 혼돈의 십년이 저물어가던 1938년, 그해 최고의 뉴스 메이커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아니었다. 교황 피우스 11세나 대중의 관심을 모으던 루 게릭, 하워드 휴, 클라크 게이블 역시 아니었다. 그해 대부분의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최고의 뉴스메이커는 다름 아닌 ‘시비스킷’이라는 구부정한 다리를 가진 조그만 경주마였다. ” - 소설 <신대륙의 전설-시비스킷> 저자 서문 중
절망의 시대는 영웅을 원한다. 전 국민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IMF 이후 월드컵 국가대표팀과 히딩크 감독은 그 어떤 연예인보다, 통치자보다 유명해졌다. 또한 그들이 일구어낸 역전의 드라마는 그 어떤 TV드라마나 영화보다 강력하게 대중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미 결과를 다 아는 경기의 재방송을 보고 또 보았고, 1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때의 감동’을 쉴새없이 회상한다. 그것은 단순한 스포츠를 떠나 IMF 말기라는 극적인 배경 속에 ‘16강에 들기조차 힘들 것 같던’ 약한 선수들이, ‘의심스러운’ 외국인 감독과 만들어낸 하나의 완벽한 드라마였다. 실화는 그 어떤 허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노동인구 25%가 일자리를 잃고 전국적인 이민과 실직자들의 이주가 넘쳐나던” 미국 대공황 시대. 볼품없는 조랑말 ‘씨비스킷’이 보여준 역전의 드라마 역시 그러했다. 경제고에 시달리던 부모 곁을 떠나 낮에는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고 밤이면 권투경기장에서 죽을 만큼 얻어터지면서 자라난 쟈니, 그는 세상에 맞서기엔 너무 작지만 기수가 되기엔 너무 컸다. 또한 “말과 마차의 시대는 이제 갔다”고 주장하던 ‘자동차 왕’ 하워드, 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을 자동차 사고로 잃는다. 유목민처럼 떠돌던 스미스는 세상과 통하는 입을 닫은 채 오로지 말과의 교감신경만을 열어놓고 산다. 경주마로서 우수한 혈통을 타고났지만 작은 키와 초라한 외모, 이상하게 생긴 다리로 조롱받는 경주마 씨비스킷은 단돈 25달러를 벌기 위해 혹독한 채찍질을 견뎌내야 한다. 이 세 사람이, 아니 4명의 팀원이 ‘공포의 외인구단’이 되어 세상에 나선다.
‘실패한 인생들의 우연한 만남-피나는 노력과 갈등-감동적인 승리-또 한번의 좌절-재기’로 이어지는 오스카용 구성에 너무나도 충실한 <씨비스킷>은 착한 영화이고, 건전한 영화이고, 바른 영화다. 그러나 이런 구성의 상투성에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가 공황 말기의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라는 점이다. “말은 너무 작고, 기수는 너무 크고, 조련사는 너무 늙은” 이 최악의 트리오가 동부 거부의 손에 의해 길러진 우수한 혈통의 명마와 벌이는 아슬아슬한 시합이나, 전국에서 ‘씨비스킷 익스프레스’을 타고 몰려든 서민들이 150cm가 조금 넘는 조랑말에 힘든 노동으로 번 피 같은 돈을 걸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간절함은 어떤 인공 조미료로도 만들어질 수 없는 천연의 맛을 제공한다.
물론 <씨비스킷>은 경마를 소재로 한 영화답게 스포츠영화로서의 미덕도 잊지 않는다. 독특한 훈련과정과 함께 특히 동부의 최고 경주마 ‘제독’과의 일대일 경주장면은, 다양한 앵글과 시점숏 등으로 마치 실제 경기중계를 보는 듯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파고> <매그놀리아> 등에서 독특한 연기를 선보였던 윌리엄 H. 메이시는 주변의 온갖 물건(심지어 여자친구)을 이용해 효과음을 만드는 걸쭉한 입담의 라디오 해설가 ‘틱톡’으로 등장해 이 스포츠드라마에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연출된 것이 자명한 광고에서 어린 축구선수에게 ‘꿈과 희망’을 주거나 “사랑해, 지성~” 하며 미역국을 끊이는 히딩크의 모습이 낯간지럽지 않을 수 있다면 “상처를 좀 입었다고 해서 인생을 접으면 안 되잖아”라며 어깨를 다독이는 <씨비스킷>의 대사가 결코 뻔한 충고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 원작 <신대륙의 전설-시비스킷>톰 스미스와 씨비스킷 과거사 궁금하세요?
영화 <씨비스킷>이 철저히 기대고 있는 것은 바로 로라 힐렌브랜드의 논픽션소설 <신대륙의 전설-시비스킷>이다. 1996년 우연히 공황기 미국인들을 열광케 했던 경주마 ‘씨비스킷’과 그를 둘러싼 조련사, 마부, 기수의 자료를 접한 로라 힐렌브래드는 바로 이 논픽션드라마의 집필을 시작했고 4년 뒤 수많은 리서치와 실존 인물의 인터뷰를 통해 원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며 “5천부만 팔려도 좋겠다. 사람들에게 씨비스킷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기쁠 것”이라던 힐렌브랜드의 기대를 깨고 책은 출판 5일 만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고 3주차에 1위에 올랐다. 2001년 20개 이상의 출판 및 언론사로부터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던 이 책은 그해 북센스 논픽션북 상과 윌리엄 힐 스포츠북 상을 수상했으며 국내에서는 2003년 출간되었다.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된 책은 이야기의 중심축인 찰스 하워드와 쟈니 폴라드, 톰 스미스 그리고 씨비스킷이 서로 만나기 전까지의 성장과정과 인생역정을 한 묶음씩 자세히 서술하고 이후 그들이 이루어냈던 믿을 수 없는 승리와 커다란 좌절 뒤의 재기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소설은 공황기 미국인들의 생활고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함께 그 시절 악덕 마주들에게 고용된 어린 기수들의 고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커스단의 곡예사’ 같은 취급을 받았던 이들은 저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장 청소약이나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던” 강산성 대변촉진제 등을 복용하는 등 인간 이하의 삶을 연명해야 했다.
또한 영화에서 다른 두 주인공들에 비해 극히 제안적으로 설명되었던 톰 스미스와 씨비스킷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책에서 더욱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수한 혈통을 지녔지만 다루기 힘든 말로 묘사되었던 씨비스킷(선원용 건빵이란 뜻)은 사실 “잠자는 게 최대의 취미”인 “병적으로 게으른” 유순한 말이었다. 도통 제어할 수 없이 성질 나쁜 말은 씨비스킷의 아버지인 ‘하드택’의 경우였다. 첫 만남에서 그는 지난 주인들의 학대와 지나친 거듭된 출전과 심한 영양부족으로 극도로 지친 상태였다고 한다. 조련사 톰 스미스는 인디언에게는 “외로운 초원인”, 백인에게는 “벙어리 톰”이라고 불리울 만큼 과묵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씨비스킷이 유명세를 타고 그 역시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 속에 놓였을 때 그는 “색다른 유머감각을 가진 괴짜 중의 괴짜”로 불렸다. 스미스는 기자들이 없는 밤에만 씨비스킷을 집중훈련시키면서 기자들의 맥을 빠지게 만들고, 잠입기자의 초시계를 뺏는 등 언론을 조롱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한 기자는 “우리는 그를 끈질기에 쫓아다녔다. 그러나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소설은 낙마 뒤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쟈니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씨비스킷의 최후까지를 에필로그에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