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인생의 대표작으로 남기고 싶다"
"지금도 `천년호'만 생각하면 고생했던 기억이 앞섭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갑옷을 입고 무거운 칼을 휘두르다보면 금세 녹초가 되지요. 겨울에는 또 왜 그렇게 추웠던지.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유행해 목숨에 위협을 느낄 때는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얘기가 없어 제작사를 원망하기도 했지요. 관객이 많이 오셔서 그 악몽과 원망이 눈녹 듯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천년호>(千年湖)(제작 한맥영화)의 시사회를 17일 마치고 기자들과 마주한 정준호(34)는 <두사부일체>와 <가문의 영광>으로 관객의 사랑을 한껏 받았던 배우답지 않게 흥행에 대한 걱정과 기대를 앞세운다.
오는 28일 개봉할 <천년호>는 9세기 통일신라의 진성여왕 시대를 배경으로 천년사직의 비밀과 목숨을 건 사랑을 그려낸 무협판타지멜로. 여기서 그는 신라의 간성인 비하랑 장군으로 등장해 산골처녀 자운비(김효진)와 진성여왕(김혜리)의 사랑을 받으며 천년의 한을 풀려는 요괴와 국운을 건 대결을 펼친다.
"지난해 <가문의 영광>이 끝난 뒤로는 코미디 제의가 줄을 이었지요. 모두 뿌리치고 제 연기인생에 대표작을 남기겠다는 각오로 이 영화를 선택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지켜내지 못했다는 회한 때문에 번민하다가 결국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내 손으로 그를 죽여야 하는 비극적 운명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정준호가 중국에서 영화를 촬영한 것은 <아나키스트>에 이어 두 번째. 이 영화를 위해 정두홍 액션스쿨에서 석 달간 격투기를 익혔고, 한국검예도 관장에게서 검술을 배웠다. 말은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승마장에서 속보로 몰아본 것이 고작이었으나 틈나는 대로 연습해 카메라 앞에서는 바람을 가르며 쌩쌩 달릴 정도가 됐다.
그의 운동신경은 충무로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다. 정작 본인은 "액션 배우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겸손하게 말하니 액션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두 명의 여배우와 베드신을 해본 소감을 묻자 동갑내기인 진성여왕 역의 김혜리를 짓궂게 쳐다보며 "아무래도 어린 여자가 더 낫죠"라고 너스레를 떤다.
정준호는 자운비로 캐스팅된 김효진(20ㆍ당시에는 미성년자)이 베드신 때문에 출연을 망설이자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작품에 꼭 필요한 노출은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해 허락을 얻어냈다는 비화도 털어놓았다.
정준호는 1995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 이란 영화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으나 본격적인 스크린 데뷔작은 2000년 4월 개봉된 <아나키스트>인 셈. 뒤늦은 출발을 만회하려는 듯 숨가쁘게 촬영현장을 누비며 <사이렌>, <두사부일체>, <흑수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하얀 방>, <가문의 영광> 등에 출연해 불과 2년여 만에 필모그래피를 두툼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얼굴값하지 못하는 미남배우'란 콤플렉스에 시달려오다가 `흥행 배우' 반열에 오른 정준호. 그가 이 영화로 연기력까지 인정받는 `행복한 배우'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