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써클>로 스크린에 돌아온 강수연
2003-11-20
글 : 박혜명
사진 : 오계옥
영화와 나는 지독한 인연

꽤 오랜만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깊은 슬픔> <블랙잭> 등 한해 동안 세편의 출연작이 개봉했던 97년도 벌써 먼 이야기다. 99년 박종원 감독의 <송어>에 출연한 이후 강수연은 4년 동안 스크린을 떠나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2년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 출석도장을 찍는 일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여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영화로 돌아왔다. <써클>에서 강수연은 살인용의자를 거침없이 주먹질하는 다혈질의 여검사 오현주로 등장한다.예의 그 쉽게 죽지 않는 센 기를 영화 속에서 발휘한 그는 기의 팔팔함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 어려운 앳된 얼굴과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난 11월6일 오후 시내 한 카페의 계단을 올라섰다. 그는 앉자마자 영화 얘기부터 꺼냈다. 맘에 썩 들지 않는 구석들도 거리낌없이 언급하는 그에게서 이 정도쯤이야 말해도 상관없을 거란 판단을 이미 끝낸 노련함이 먼저 전달됐다.

‘강수연’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다른 인터뷰와 달리 유난히 긴장이 되는데요. 제발 나를 보고 긴장들 좀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뭐 잡아먹는 사람도 아니고. 신인배우들 있잖아요, 어렵대요, 내가. 워낙 오래 했으니까. 좀 지나고 친해지면 그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어려웠다고. 그럼 내가 그러죠. 야, 남들이 들으면, 내가 생긴 것도 그렇고 진짜 못되게 구는 줄 알아.

정웅인씨가 그랬대요. 누나라고 부르고 싶은데 같이 술 마실 기회가 없어서 그러질 못했다고. 정웅인씨와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만났죠, 서로 화면에서만 보다가. 근데 영화 한 작품을 하면서 상대배우랑 한번도 진하게 술을 안 먹었던 경험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요. 보통은 회식자리도 많고 서로 술자리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한번도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 같아.

왜 그랬던 것 같아요. 워낙 현장이 바빴어요. 여유롭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중간에 한번 제작이 중단됐고. 그러니까 그럴 분위기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거죠.

연기생활을 27년 정도 했죠. 아니, 더 했죠. 징그러워. (웃음) 외국 가서 인터뷰하고 그러잖아요. 연기를 얼마나 했냐, 물어보면 그냥 많이 했다. 그래도 얼마나 했냐, 그러면 30년도 더 했다. 그러면 기자들이 너무너무 놀라요. 도대체 몇살인데 그렇게 많이 했냐고. 그럼 아기 때부터 했다고 그래요. 근데 너무 어려서 한 것은 경력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 같고, 내 자아를 갖고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 고등학교 졸업하고부터니까 그렇게 따지면 그 정도 됐죠.

84, 85년쯤인가요? 그래서, 그전에도 출연작들이 있지만, 85년부터 99년까지의 필모그래피를 보니까, 14년 동안 스물다섯편을 했더라고요. <고래사냥2>부터 <송어>까지. 그래요? 많이 했네. 근데 그전이, 주는 대로 했으니까 더 많죠. (웃음) 85년 이때는 이미 정신차리고 하던 때고. 영화가 너무 좋고, 너무 하고 싶고 그래서 내 나름대로, 나이는 어리지만, 시나리오도 열심히 읽고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물어보고 이래가면서 골라서 한다고 해서 편수가 줄어든 거지. 그전에야 뭐, 알잖아요, 세편 네편 한꺼번에 찍고.

연기가 이런 거구나, 라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는 건데, 구체적으로 어떤 거예요. 내가 정확하게 연기를 시작한 게 네살 때부터예요. 그러니까 엄마, 아빠, 아 좋아, 이런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연기를 한 거예요. 그때는 내가 연기를 한다라는 느낌이 아니라 아저씨들이 와서 너 이렇게 해봐, 웃어봐, 그래서 그대로 하면 아이 예쁘다, 이런 거지. 그렇게 유아기,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워낙 오래하다보니까 그 생활이 익숙해지고 현장에 굉장히 적응을 잘하는 아이였던 거죠. 하지만 그때는 내가 영화를 매일 찍고 있고 연극을 하고 TV를 하지만 그게 뭔지를 모르고 했던 시기고. 고등학교 1, 2학년 되면서부터 내 인생의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부턴가 관객의 입장으로 영화를 너무 좋아하게 됐어요. 내가 출연한 영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출연한 영화를 보러가는 게 너무 좋고, 그 나이에 왜 극장 앞만 걸어가도 가슴이 막 설레고. 그 나이 또래에 영화를 좋아하는 청소년들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낀 거죠. 내가 하는 이 일을 기왕이면 좀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공부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그즈음인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연극, TV, 영화를 같이 하다가 이젠 영화만 해야겠다 생각한 것도. 그때부터 영화만 했죠.

그 이후로, 단순히 편수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꽤 긴 전성기를 거치면서 지칠 일이나 회의가 많았을 것 같아요. 많죠.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가 너무 좋고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재미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기 싫은 일도 많이 해야 한다고. 만약에 내가 하는 일을 열 가지로 분류한다면 그중 두세 가지는 좋아하는 일이고 나머지는 하기 싫은 거예요. 그 두세 가지를 하기 위해서 나머지를 하는 거죠.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 일에 회의도 많이 느끼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도 그만두질 않는 걸 보면 뭐, 좀더 할 것 같아요. (웃음)

정말로 힘들었던 기억 중에 지금까지도 얘기하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일을 할 당시에 그때는 진절머리나게 싫었던 순간. 어떤 한 사건을 들어서 그게 너무 싫었다라는 건, 사람 살면서 싫은 사건 많이 겪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건에 비유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배우. 특히나 여배우. 여자배우를 보는 사회의 시각. 그러니까 여배우를 어떤 한 영화에서 정말 필요한 부분으로 여기고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서 그 배우가 기여하는 것과 그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보는 게 아니라 여배우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온갖 표현들만 있고 또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 게 제일 싫죠.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사회생활을 활발하게 한다는 게, 일반 회사원들한테도 굉장히 힘들잖아요. 그런데 여배우들은 특히나 드러나 있고, 그래서 아마 조금 더 힘들 것 같고. 그리고 사람을 많이 상대해야 한다는 게 힘들어요. 이건 개인적인 건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또 잘해야 하고. 사실 잘 안 되잖아요, 그런 건.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취향은 아닌 거 같아요. 그리고 물론 굉장히 중요하기도 하지만, 너무 상업적으로 평가받는 거. 영화의 흥행은 중요하죠. 흥행이 돼야 배우가 남는 거니까. 그래도 나를 정말 잘 아는 절친한 몇몇한테가 아니면 그런 식으로 포장되는 게 싫죠.

좋은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그런 자부심으로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게 아닌가 싶어요. 배우가 배우로서 지속될 수 있는 힘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건 정말 그렇지 않아요. 배우라는 건 왜 우리가 스텝 바이 스텝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직업이 아니고, 경력제도 아니고, 한 작품이 끝나면 발가벗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전 작품이 성공을 했건 성공을 하지 않았건, 그런 직업인 거 같아요. 어느 날 내가 스타였다가 뚝 떨어졌다, 이런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서 한 작품이 끝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무에서 다시 인정받아야 하는.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왜냐하면 전작이 있고, 기대치가 있고, 그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기대치라는 게 생각보다 꽤 높고. 그러니까 내 능력으로는 그 기대치만큼 해내기도 버겁고. 그런데 항상 더 해야 한다라는 욕심은 있고. 그러니까 난 작품이 끝나면 다 잊어버려요. 그걸 기억하는 게 저 같은 경우에는 별로…. 그냥 딱 잊어버리고 해야 해요.

4년 만에 복귀하는 영화로 <써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인천하>를 2년이나 했잖아요. 일단 거기에 너무 지쳐 있었고, <여인천하> 하면서 사극의 이미지가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게 싫더라고요. 내가 나를 봐도 싫은데 남이 보면 얼마나 싫을까 싶어서 그런 이미지를 없애려고 가만히 있었죠. 그러면서 작품에 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저는 작품을 고르는 원칙은 없어요. 그냥 시나리오를 읽어봐서 내가 좋은 거 해요. 그게 섹스물이건 코미디건 액션이건 드라마건. 장르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이전에 수십편의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그 시나리오들하고 참 다른 느낌으로 오더라고요. 오랜만에 색깔이 다른 시나리오를 읽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게 큰 매력으로 왔어요. 흥행도 중요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후회가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에 대해 드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아요. 영화를 하면서 항상 느끼는 건데, 대형제작비로 만들어지는 영화도 있고 아주 저예산으로 되는 영화도 있잖아요. 저는 저예산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만 생각해도 참 복잡한데, 그외의 것들 때문에 쫓기고 힘들 때 그게 참 안타까워요. 이 영화 역시 중간에 중단됐었고…. 제작지원 문제, 결국은 돈문제인데 그런 것들로 감독이 밤새워서 고민하고 촬영현장에 있지 못하고 뛰어다녀야 되고 이런 것들이 참 안타까웠어요.

예상하고 있는 질문이겠지만 중견배우들, 특히 여배우들은 한창 전성기엔 아까 얘기한 그런 고민들에 휩싸여 있다가 일정 나이를 지나고 나면 배우로서 운신의 폭이 굉장히 좁아지는 것 같아요. 요즘 같은 한국 영화시장의 트렌드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구요. 영화시장이 작은 거예요. 시장이 작고 관객층이 얇기 때문에 관객한테 영화가 맞춰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 같아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화시장이 커져야죠. 그런데 이 조선팔도에 그것도 반 잘린 나라에서 인구 1억명이 안 되는 나라에서 커지면 얼마나 커지겠어요. 결국 밖으로 나가야 해요. 방법이 그거밖엔 없잖아요?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되고요. 그리고 애들 영화만 찍든 하이틴영화만 찍든 배우는 다 있어야 돼요. 갓난아이부터 70살까지 다 있어야 돼요. 꼭 필요해요. 필요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몫들을 저를 비롯한 배우들이 못해내는 게 현실이죠. 주인공을 안 하더라도 그 영화에서 정말로 보석 같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 나와줘야죠. 지금이 그렇게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다보면 내가 70살이 됐을 때 <황금연못> 같은 영화도 찍을 수 있는 시장이 되겠죠.

배우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있잖아요. 강수연씨가 Mcity라는 프로덕션매니지먼트 회사에 이사로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 아닌가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에요. 방송쪽 프로덕션이니까 넓게 보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영화를 위해 뭘 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영화계가 많이 달라졌죠? 피부로 느끼기에도. 많이 달라졌죠. 현장은,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 굉장히 젊어졌어요. 그리고 관객의 반응이 빨라졌고. 인터넷이라든지 이런 것들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빠르고 솔직해졌고.

본인한테도 영향을 끼치겠죠. 나는 나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 찍어서 나 혼자 보고 치울 것 같으면 나 좋은 거만 하면 되지만 남 좋은 거 해야 하잖아요, 지금. 남들이 좋아하는 거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남들의 취향에 내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내 가치관이나 생각이 변한다는 게 아니라 그들을 인정하는 거죠. 그게 좋다 나쁘다라고 평가하지 말고 그 자체를 인정해서 흡수하는 거지 내가 그들을 따라가겠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배우는 캐릭터로 보여지는 거잖아요. 강수연씨가 예전에 해왔던 캐릭터들과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들 사이에도 변화가 보이나요. 내가 10대, 20대, 30대 역할들을 다 해왔지만, 나이만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잘해야지 내가 40대, 50대에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안 그러면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겠죠. 근데 아직은 더 하고 싶어요, 이 일을.

다른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잘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했으니까. 이것말고는 다른 세계에 대해서 너무 모르니까.

그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계속 해야만 한다, 내 일이다, 라는 생각을. 지독한 애정. 지독한 인연 같아요. 물론 시작을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죽 익숙해지다보니까 이쪽으로 굉장한 애정을 갖게 되고, 아직도 짝사랑하고 있고. 내가 잘하고 못하고는 그 다음이고…. 계속 할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밖에 잘 안 나가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이런저런 행사에는 곧잘 참여하는 것 같아요. 부산영화제는 거의 매년 참석했고. 제가 되게 게을러요. 그래도 그런 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큰 상을 받는 데도 참석을 해야 하지만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 참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없는 영화제는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다녀요. 안 불러주면 전화해서 물어보고. (웃음) 그게 내가 대접받는 길이고, 다같이 대접받는 길이니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