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한심한 되풀이,파트리스 셰로의 <정사>
2003-11-20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파트리스 셰로의 <정사>는 유럽의 예술영화가 과감한 성적 표현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가장 최근의 사례라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이 낡은 장삿거리에 대한 어떤 향수와 다소의 교활함마저 내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처럼 장소 불명의 빈 아파트에서 한쌍의 낯선 남녀가 관계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백주대낮, 문을 열어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남자는 “동의하나요?”라고 묻고, 여자는 망설이지만 남자는 결심한 듯 그녀를 안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옷 밖으로 허물어져나와 남부 런던의 어딘가의 후줄근한 침대방 바닥을 뒹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첫 장면부터 영화의 끝까지 <정사>는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시종일관 베껴대는데, 그 수준이 가히 싸구려 모작이나 한심한 되풀이의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우스꽝스러울 만치 화려한 안토니오니의 <욕망>(Blow Up)과 의도적으로 수위를 낮춰 만든 드 팔마의 리메이크작 <필사의 추적>(Blow Out)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무엇이 여기에 있다). <정사>의 두 주인공은 모두 중년의 남녀로 그들 사이의 섹스는 열광적이면서도 음란하며 적당히 자연주의적이라고 할 만한데(이 영화에서는 쓰고 버린 콘돔마저 크게 클로즈업될 만한 값어치를 지닌다) 이런 성향은 이후에 이어지는 4번의 밀회장면과 남자주인공이 욕실에서 벌이는 솔로(?) 연기에서 더욱 노골화된다.

셰익스피어 비극을 연기해온 마크 라일런스와 뉴질랜드 출신의 캐리 폭스가 과감한 연기를 펼쳐 보이는 영화 <정사>는 제이와 클레어 두 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익명의 성적관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필사적인 전라 연기에서 보여주는 두 배우의 훌륭한 팀워크만큼(폭스가 둥글고 풍만하다면 라일런스는 각지고 야위었다) 옷을 입은 미묘한 상태에서의 두 배우의 연기는 매력적이지 않다. 사실 영화 전체가 이러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인물들은 성관계 이외의 부분에서는 서로 겉돌기만 한다. 폭스는 시종 시무룩하고 초라해 보이고 라일런스는 삐딱하고 퀴퀴해 보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의 말론 브랜도 캐릭터처럼 제이는 최근에 그의 부인을 잃었는데, 이 역시 자신이 그녀와 두 아이를 스스로 떠나왔기 때문이다.

하니프 쿠레이시의 1999년 동명소설에서 이름을 따왔고 동일 작가의 초기 단편소설 <나이트라이트>에서 내용의 상당 부분을 차용해온 영화 <정사>는 파트리스 셰로의 첫 번째 영어영화 시도인데, (마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베르톨루치의 첫 번째 영어영화였던 것처럼) 때문에 더러는 이 감독이 영화 속 배우들만큼이나 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베를린영화제에서 <정사>가 금곰상과 여우주연상을 함께 수상했을 때 대부분의 런던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혹평했었고, 몇몇은 영화 속에 반영된 런던 사람들의 모습과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아마도 우쭐거리는 프랑스인 게이 동료로부터 제이가 듣고 있는 한심한 충고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사>가 진짜 영국스러운 것이건 말건 간에 이 영화가 최소한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와 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부조리하리만치 화려하고 감정적인 유사-속물주의에서 벗어나 특유의 “키친 싱크 스타일”(하층민의 빈곤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국영화 스타일을 이르는 말)을 확립하고 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과도한 육욕의 남발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뤼시앵 프로이드의 미술 작품들을 연상시키고,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은 도그마영화의 경계에 맞닿아 있다. 조명은 거칠고 카메라는 자주 핸드헬드로 움직이며, 고함소리와 갑작스러운 충돌음을 곁들인 사운드트랙은 소음에 가깝다. 게다가 편집은 무원칙적이고 때때로 줄거리는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우리는 클레어와 제이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매주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알려하지 않은 채 밀회를 가지기로 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제이가 클레어의 사생활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게 된 첫 번째 상대인 듯하지만,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제이는 클레어를 숨바꼭질하듯 미행하며 런던 구석구석을 누비고 버스에 올라탔다 내렸다를 반복하는데, (이 미행장면은 마치 영화 속의 정사장면들과 같이 안무되어 있다) 제이는 마침내 이웃의 어느 지하 극장에서 클레어가 다소 독특하게 연출된 <유리동물원>(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1945년 뉴욕 초연- 역자)을 (서툴게) 공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처럼 <정사>는 삼각관계에 주안을 두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클레어는 난해무쌍한 뉴웨이브 영화감독에 연연하기보다는 앤디라는 이름의 성미 좋고 수다스러운 택시기사와 엮인다(앤디 역의 티모시 스폴은 런던의 지역색을 어마어마하게 풍긴다). 제이는 바에서 앤디를 만나 안면을 트고는 부인의 부정을 알 리 없는 이 사내를 서슬 퍼런 농담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가히 효과적이라 하리만치 불쾌한 이 장면들은 클레어가 (마리안 페이스풀에 의해 런던 토박이의 모습으로 최악으로 매력없게 연기된) 그녀의 연기과목 동료와 점점 감정적으로 변해가는 장면들과 균형을 이루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의 클레어는 어떤 종류의 쇼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녀가 진짜로 연기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일까? 셰로 감독의 원래 직업 분야였기 때문일까, <정사> 속에서 연극은 영화의 중심 메타포로서의 섹스를 대체하고 있다. 클레어가 그녀의 야간 연기수업에 지쳐갈 무렵, <정사> 역시 결말을 찾아 점점 필사적으로 변해간다. 영화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감정적 대립 사이를 헤매고, 무대가 사라지자 이야기의 끝은 산산이 무너져내린다. 하긴 무모하리만치 부자연스러운 다른 영화 속의 정사들과 비교해보면 <정사>는 자제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왔다가 떠나게 마련, 이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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