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가장 성공적인 옴니버스 영화,<여섯개의 시선>
2003-11-20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자유로운 선택과 자발적 열정의 산물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If you were me(당신이 나라면)’이다. 이 조심스러운 가정법은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조심스러운 태도이자 화법이다. 6인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재치로 지루할 틈 없는 영화들을 엮어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소중함이 단지 그 종합선물세트 같은 풍요로움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진심으로 이 시대에 마땅히 물어져야 할 질문들을 던진다. 그 진심은, 때로는 유쾌하고 경쾌한 표정 속에, 때로는 가학적이고 위악적인 몸짓 속에, 그리고 또 때로는 초현실적인 모호한 표정 속에 담겨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것이 각각을 따로 볼 때보다 서로서로를 뒤섞어 볼 때 더 잘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두번 이상 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짧고 경쾌하게, 또 한번은 길고 묵직하게. 아마도 이 영화는 이후에 여러 부문의 기록을 가질 듯싶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옴니버스영화라는 타이틀은 쉽사리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영화가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어떤 표정이 보인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국가기관이 기획과 제작의 주체이다. 말하자면 태생적으로 ‘국책홍보영화’였던 셈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6인의 참여 감독들에게는 가장 많은 ‘창작의 자유’가 주어졌다. 따분한 홍보영화라는 태생적 낙인을 지우기 위해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길은, ‘함께, 그러나 따로!’라는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물론, ‘인권’이라는 큰 주제의 제한, 그리고 빠듯한 시간과 (국가)예산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한계는 있었다. 그러나 6인의 감독들은 한결같이 그 제한과 구속을 즐거이 받아들였고, 자발적 열정으로 결국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다(일부 감독은 초과 예산을 자비 부담하기도 했다). 각자의 이력에 따른 개인차는 어느 정도 있겠지만, 상업영화 속에서는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었던 자기 발언을 마음껏 드러내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흥행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자발적 열정의 정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유로운 선택과 자발적 열정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이 6편의 영화는 그 내용(소주제)과 형식(스타일)에서의 다양한 개성에도 불구하고 전체가 잘 어우러진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따로 또 같이’, 이 말만큼 이 영화에 어울리는 말은 없다. 6편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인권’(차별)이라는 말에 덧붙어져 있던 과거의 이미지(계급적, 사상적 차별 또는 갈등과 연관된 ‘무거운’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다.

일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권(차별)의 미시정치학. 각 영화는 저마다 다른 스타일과 화법으로, 일상 곳곳에 있는 다양한 ‘차별’의 문제들을 응시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한 6개의 시선들은 결국 서로 내밀하게 소통하면서 하나로 수렴되고, 서로 달라 보이는 스타일은 서로를 보충해주는 다면적 레고블록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6개의 다면적 레고블록은, 어떤 순서로 편집하든, 결국 하나의 작품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6편이 공유하고 있는 미시정치학적 시선은 주로 일상 속의 ‘신체의 정치학’(외모, 장애, 인종)으로 모아져 있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이지만 또한 복잡하고 미묘한 그 문제들을 단편의 형식으로 온전히 포착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여섯개의 시선>에서 각각의 단편은 서로서로를 응원하고 보충함으로써, 이 시대에 대한 명확하고 뚜렷한 어떤 이미지에 도달한다. 이하의 내용은 내 나름대로 해본 블록맞추기의 기록이다.

일상 속의 신체 정치학

임순례 감독은 가장 그녀다운 ‘소주제’를 선택했다(또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인터뷰에서 그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루고 싶었지만, 이미 그것은 박찬욱 감독이 선점한 상태였다고 한다). 잘나지 못한 외모 때문에 취업에 실패하고 마는 여상 3학년의 고군분투기. 전작들(<세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또 한편의 성장영화가 되었지만, 그 화법은 한결 유쾌하면서도 직설적이다. 감독은 직설적인 대조법으로, 그녀를 좌절케 하는 남성 중심적인 시선의 권력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 땅의 어떤 여성들도(예쁜 얼굴의 그녀들조차도) 그 무게(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박광수의 <얼굴값>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화답하고 있다. <그녀의 무게>에 등장하는 많은 그녀들처럼 “갈 곳도 많은” 얼굴을 가지고서 지하주차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가 ‘얼굴값’을 치러야 하는 이유이다. 예쁜 얼굴 때문에 당해야 하는 수난(차별). 그 역설적인 문제제기는 뿌리깊은 남성적 시선의 권력을 겨냥하고 있다. <얼굴값>의 기묘한 반전을 논리적으로 독해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 남자가 여자의 영정을 먼저 보았으며, 주차장에서의 승강이는 남자의 꿈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꿈에서도 작동하는 권력, 오히려 꿈이기에 더욱 강고하게 작동하는 권력. 남자 자신조차도 그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자는 꿈꾸듯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악순환은 곧 ‘그녀(들)’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무게’이기도 하다.

가엾은 인종주의

영어 발음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가해지는 설소대 수술. 감독 박진표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끔찍한 ‘가해장면’을 꼼짝없이 바라보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전체가 하나의 클로즈업이다. 냉정하게 자막으로 설명되는 수술과정과 포박당한 아이의 뒤틀림과 비명소리. 설혹 현미경으로 확대된 ‘절개’와 ‘봉합’의 클로즈업에서 시선을 돌린다 해도, 우리는 결코 아이가 느낄 공포감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시간을 클로즈업한다. 그래서 가장 짧은 러닝타임(12분)의 이 영화는 가장 긴 영화이기도 하다. 그 가학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단지 부모의 욕심에 의해 희생되는 아이의 인권문제만이 아니다.

과잉에서 비롯되는 아이의 신체적 손상은, 결여로 인해 생긴 선경(<그녀의 무게>)의 눈 위에 남은 상처과 대조를 이룬다. 부모의 욕심의 정체는 결국 백인 우월주의를 내면화한 허영심이다. 그리고 이 가엾은 인종적 열등감은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라는 거울을 통해 어설픈 인종족 우월감(자기 자신의 분신!)과 만난다. 단지 라면값이 없어서, 우리의 무관심과 무능 때문에, 무려 6년4개월을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어야 했던 네팔 노동자 찬드라의 기막힌 사연(이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박찬욱은 90%가 넘는 ‘찬드라’의 ‘주관점 시점’을 통해 우리 모두의 것일 수 있는 그 표정과 모습을 바라보게 만든다. 감독 자신의 말처럼,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며, 그래서 이 영화는 단편 역사상 가장 많은 등장인물을 지닌 영화일 수도 있다.

인권의 핵심 혹은 극한

이 두편의 영화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대륙 횡단>이 파격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리얼리즘적인 극영화라면, 후자는 근미래 SF라는 장르의 형식을 차용한 초현실주의적 영화이다. 각각의 영화는 현재의 미시정치학 또는 인권정치학이 과감하게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지점과 아직은 그렇지 못하지만 반드시 질문되어야 할 지점에 그 시선을 두고 있다. <대륙 횡단>은 뇌성마비 1급 장애인 문주의 성장기이다. 여균동 감독은 불과 14분의 시간을 13개의 에피소드로 분할한다. 그러나 그 툭툭 던진 듯한 13개의 에피소드는 가장 고전적인 ‘극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고전적인 정치적 연대의 드라마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주체의 성장드라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마치 짧은 폭소로 시작되었던 ‘음악감상 시간’이, ‘그 음악’이 경쾌한 합주로 반주되면서부터, 사실은 가장 길고 불편한 고문의 시간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사정>. 그녀가 선택한 주제는 가장 젊은 나이답게 도전적이다. 그녀는 ‘성폭력사범 신상공개는 정당한가?’라는 논쟁적인 주제를 도발적 화법으로 던진다. 감독이 비유적 화법으로 오줌싸개와 성폭력 사범 사이에 깔아놓은 그 아슬아슬한 거리는, 때로는 현기증날 정도로 위험스러 보인다(그 비유의 논리적 극한은 오줌을 싸는 것과 성폭력은 어쩔 수없는 생리적 현상이자 한때의 실수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 시기 인권(차별)의 미시정치학이 마땅히 던져야 할 물음의 극한이기도 하다.

그 극한의 질문을 위해 그녀는 근미래 SF라는 가정법을 설정한다. 그 미래는 일종의 신종 ‘전체주의’(극한적 청결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총체적 감시 장치를 갖추고 있는 전체주의)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그 극단적인 (도덕적) 청결주의는 역사 속의 모든 전체주의가 지니고 있던 표정이기도 하다. 전체주의가 지닌 그 극단적인 현미경적 감시의 시선은, 웬만한 작은 차이는 모두 같은 것으로 봐버리는 눈 먼 시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재은이 젊은 시선으로 던지는 이 질문은, 우리는 ‘그 남자의 (진짜) 사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알 수 있는가)라고 하는 조심스러운 반문이면서, 동시에 인권(차별)의 정치학이 빠져들 수 있는 눈 먼 도덕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녀가 던지는 그 질문들을 오줌싸개 아이의 주관적 시점을 통해 웃으면서 그러나 내심 불편한 심정으로 마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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