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공포영화에서 멜로코드로 20년만에 부활한,<천년호>
2003-11-25
글 : 이영진
■ Story

통일신라시대 말기. 도처에 전쟁이 끊이지 않아 민심은 도탄에 빠져있다. 잦은 반란으로 궁궐 또한 흉흉하다. 그러나 진성여왕(김혜리)은 나라를 지키는 것보다 전장에 나가 있는 대장군 비하랑(정준호)의 안위가 더 걱정이다.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비하랑에게 여왕은 천한 계집과 살 필요가 있느냐고 타이른다. 비하랑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연인 자운비(김효진)의 사랑을 저버릴 수 없다며 여왕의 구애를 거부한다. 무예에 능한 묘현거사를 거들며 사는 자운비와의 만남도 잠시, 비하랑은 자운비가 쥐어준 언약의 징표를 목에 걸고 또다시 역모를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 나선다. 얼마 후 자운비에게 비보가 전해진다. 비하랑이 전투 중 다쳐 목숨이 위급하다는 것이다. 전갈을 받고서 궁궐 입성을 위해 길을 나서던 중 자운비는 자객들과 대하게 만나게 되고, 그때서야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고 계략을 꾸민 것임을 알아챈다. 그녀를 욕보이려는 남정네들을 피해 도망친 곳은 천년호가 내려다뵈는 절벽. 결국, 자운비는 천년호(千年湖)에 뛰어든다. 원한의 복수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 Review

20여년 만에 ‘천년호’가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번엔 천년 먹은 여우가 주인공이 아니다. 신상옥 감독이 1969년에 내놓은 같은 제목의 공포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천년호>의 ‘호’는 여우(狐)가 아니라 호수(湖)를 뜻한다. 물밑에서 원한을 머금고 올라오는 건 여우가 아니라 신라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에 의해 몰살당한 아우타 족의 원혼이다. 천년호(千年湖)를 양수 삼아, 자운비의 몸을 빌어 아우타의 복수극이 벌어지고 급기야 궁궐 안에서도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천년호>는 컴퓨터 그래픽을 덧입히고 무협액션을 가미하느라 만만치 않은 제작비가 들어갔다. 순제작비만 62억원이다. 원작과 달리 노리는 급소가 상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장면에서터 이는 뚜렷하게 갈린다. 진성여왕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장면 대신 신(新) <천년호>는 박 혁거세와 아우타 족이 벌이는 거대한 싸움으로 판을 벌인다. 결과야 미지수지만 비주얼로 눈길을 잡아끌겠다는 것이다.

이는 전투 장면 재현에서도 드러난다. <천년호>는 일부 보충 분량을 제외하곤 중국 현지에서 모든 촬영을 치뤄냈다. 제작진은 면적이 남한의 4배나 되는 저장성 일대를 6개월 동안 돌아다니며 촬영 장소를 물색했다. 일부러 “중국 냄새 나는 곳은 무조건 배제했다”지만, 비하랑이 역모를 꾀하는 무리와 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병풍처럼 포개진 기암절벽과 자금성을 거의 실제 크기로 본 떠 만들었다는 궁궐 등은 그 자체 눈요깃 감으로 충분하다. .

여기에 더해 <천년호>는 최루성 멜로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다. 악령이 거한 연인의 몸을 제 손으로 베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은 원작과 같지만 <천년호>는 또다른 이음새를 덧대서 멜로를 강화한다. 진성여왕이 자운비를 해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비하랑이 오해하게끔 만든 것인데 이로 인해 진성여왕은 비하랑의 마음을 뺏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결국 비하랑은 자운비만을, 진성여왕은 그런 비하랑을 바라보기만 하는 외사랑의 연쇄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옛적 <천년호>의 긴장이 사라지고 없다. 신상옥 감독의 <천년호>는 지금 다시 보면 특수효과 등은 미비하고 조악하지만, 인물들은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갈등을 지켜보면서 관객들도 흔들리고 흥분한다. 그런 떨림이 20년 후에 부활한 <천년호>에선 제거됐다. 대신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해바라기 식 사랑이 피어난다. “난 밤에는 여왕이 아니다”라며 몸을 기대던 진성여왕은, 이제 “당신에 대한 순정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라는 순애보적 언약으로 일관한다.

산자들의 욕망과 죽은자들의 저주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과 반응의 계기판이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데는 그런 일차원작 캐릭터 외에도 허술한 만듦새가 한몫한다. 카메라는 정서를 내뿜기 보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친다.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줄창 끊이지 않는 음악이 드라마의 길을 안내하는 인도자처럼 보인다. 무협액션 또한 홍콩 무협영화의 과거를 반복하고, CG 또한 신비로운 주술의 세계를 재현하기에 역부족이다.

<천년호>에는 프로덕션을 짜임새 있게 운영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겪은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한때 <인생> <트라이어드>에서 장예모 감독과 호흡을 맞춘 뤼웨 촬영감독, <방세옥> <키스 오브 드래곤> 등 이연걸의 안무 파트너로 잘 알려진 위엔더 무술감독 등 중국 쪽 스탭들이 대거 가세했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지만, 악천후 등의 이유로 촬영 기간이 늘어나면서 결국 국내 스탭들로 교체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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