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살의 임수정은 지금까지 고등학생 이하의 역할만 맡아왔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골칫거리 대통령 딸이 그랬고 <장화, 홍련>에서 죄의식을 지닌 수미가 그랬다. 동시에 이 역할들은 또래와 구별되는 조숙함을 요구했다. 실제 임수정이 그렇다는 걸 아는 듯. 그에겐 복잡한 생각과 성숙한 깨달음이 줄 수 있는 조심스러움과 일종의 냉기가 있다. 작고 마른 체구는 의지로 버릴 수 없는 예민함의 증거 같다. 특유의 볼멘 뺨은 내 이야기를 안으로 쌓아두는 천성의 흔적일 것이다. 임수정은 혼자 있는 데 익숙하고 혼자 있길 좋아한다. 요즘도 쉬는 날엔 모자를 눌러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혼자 시내를 누빈다.
긴 시간을 두고 사람과 친해지듯 캐릭터와 친해지는 임수정은 카메라를 친숙히 대하는 데에도 기간이 필요했다. 세 번째 영화에 와서야 임수정은 카메라에 친숙함을 가졌다. “그전까지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두려웠어요. 그런데 이제 친해진 것 같애요, 나도 모르게. 카메라가 옆에 있으면 왠지 안정감도 들고.” 그가 소리내서 웃는다. “못하면 NG내지. 될 때까지 테이크 가는 거지, 하는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제가 현장에서 원래 말이 없는 편인데, 이번엔 스탭들하고 친해지려고 바보 같은 행동도 많이 하고 우스꽝스러운 짓도 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것도 나중엔 편해졌어요.
” 현장에서 달라지자 연기가 편안해졌다. 그는 자기 자신이 이렇게 밝을 줄, 이렇게 활짝 웃게 될 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장화, 홍련>의 수미에 가까웠던 성격은 극중 민아가 그런 것처럼 밖을 향한 문을 열어둘 수 있게 됐다. 그 문 틈으로, 바람처럼 여유가 새들어왔다. “나이보다 어린 역할들만 하게 되는 거 서운하죠.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도 내 나이의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근데 사람들이 그걸 믿어주지 못하고 내 표현이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속상해요. 근데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내 안에서 그런 성숙함이 자연스럽게 풍길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 같아요.”
<장화, 홍련>의 흥행 때문인지 <…ing>의 현장 스탭들이 자신을 다르게 보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는 그는, “나는 그대로인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데”라는 말에 힘을 준다. 그래서 다행이다. 임수정은 드라마에서 소모된 적이 없고 CF로 쉽게 이미지를 만들지 않았다. 그의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조몰락거리기 까다롭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바로 이런 점을 교묘히 이용하지 않은 것은 더욱 다행스럽다. 배우의 본래 성격이 만들어낸 캐릭터는 드라마의 인지도와 CF의 강렬한 화면이 제조한 이미지보다 단단하다. 단단한 만큼 꺾이면 부러지지만 성질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앳된 얼굴과 성숙함의 공존, 이 매력과 더불어 임수정이 풍기는 고상한 한기(寒氣)에는 힘이 있었다. 홀로 세운 성 안에서 강하게 자란 여인의 카리스마로 언젠가 불리게 될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