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여고생의 사랑 이야기를 성장영화와 멜로드라마 그 무엇인가의 풍으로 표현한 영화, <…ing>의 이언희 감독을 만났다. 1976년생, 그러니까 분명 빠른 데뷔작을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이언희 감독이 종종 듣는 말은 “너무 안정적”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비판이기도 하고, 인정이기도 하다. 젊은 감독, 게다가 흔치 않은 여성감독에게서 <…ing>의 의미를 듣는다.
<행복한 장의사> 연출부를 했다. 직장을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사람들과 일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경험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힘들었던 점도 있다. 영화는 사람들끼리 작업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언뜻 자유롭고 창의적인 작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상업영화는 시간에 쫓기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군대와 비슷한 서열관계가 생기기도 한다. 거기에 적응하는 것이 좀 힘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것, 그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배운 것 같다.
<…ing>를 만들면서는 그 낯선 규율의 가장 상위의 자리에 자리한 셈이다. 어떻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율했는가. 그게 사실은 가장 걱정이었다. 잘하진 못했지만 많이 배웠다. 연출부일 때와 감독이 되었을 때는 너무 많은 것이 달랐다. 그때 내가 가졌던 불만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감독님이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를 다시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러니까 처음에는 모든 스탭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에 너무 신경쓰다 보니까 더 시간에 쫓기는 면이 생겼다. 그러면서 아, 나중에 이해받아야 할 부분도 있겠구나 하는 걸 느꼈다. 지금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독한 감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격만 좋아서는 살아남기 힘든 세계인 것 같다. 좋은 사람과 독한 감독 둘 모두가 될 수 있다면 물론 더 좋겠지만.
각색 과정에서 가장 크게 변한 점이 있다면. 감정적인 면인 것 같다. 스토리의 재미가 분명했고, 대사가 좋은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약간 단선적이라고 느꼈다. 각색하는 데 1년이 걸렸는데, 원래 계획보다는 좀 오래했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하는 시나리오들도 있는데, 이건 조금만 손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완벽하게 내 것이 되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캐릭터들의 관계에 많이 신경을 썼다. 처음 시나리오에는 대화로 설명되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대신 상황을 많이 만들었다. 민아가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등등. 좀더 이미지로 많이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민아가 엄마하고 같이 있을 때, 혼자 있을 때 뭘 하는가 하는 상황을 많이 만들었다. 처음에는 거의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재 분량이 편집에서 좀 잘리긴 했지만, 처음보다는 거의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에 영재와 민아의 이야기를 많이 집어넣었다. 이미숙 선배님이 연기한 엄마 미숙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이 영화를 끌어주는 역이다. 미숙은 딸 앞에서는 맑게 웃지만, 뒷모습은 한없이 슬픈 역이다.
김래원씨의 캐스팅은 영재의 역을 늘린 뒤에 선택한 것이었나. 사실 <…ing>에 캐스팅 된 뒤에 <옥탑방 고양이>에 출연한 것이었다. 실제 그 배우 나이 또래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면 신선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옥탑방 고양이>가 먼저 나오는 바람에…. <옥탑방 고양이>를 이 영화 촬영 들어갈 때쯤이어서 못 봤는데,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김래원씨는 자신이 <옥탑방 고양이>의 경민이와 달라야 한다는 부담을 많이 갖고 있었다.
연출 스타일이 궁금하다. 예를 들어 원하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테이크를 반복하는 스타일인가. 제대로 하면 그렇겠지만, 시간문제상…. 김래원씨의 연기는 테이크를 반복할수록 연기가 더 재미없어진다. 자기도 더 재미없어하고, 오히려 첫 테이크 때보다 리허설 때가 훨씬 더 좋다. 그런데 임수정은 하면 할수록 더 좋아진다. 그 둘을 담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 따로 찍을 때는 상관없지만, 같이 찍을 때는 그 중간선에서 타협해야 할 때가 많았다.
요즘 인터넷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붐이 일고 있다. 대부분 그런 영화들에서 주인공은 여고생이다. <…ing>에도 여고생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세대의 문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성장영화보다는 멜로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민아라는 캐릭터가 딱 지금의 여고생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아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환경으로 살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여고생의 캐릭터가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영재의 경우에는 그런 문화를 설명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영화 속에서 민아는 뭔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내 경우에는 민아의 성장영화라고도 생각한다.
영재의 사랑은 아주 고전적이고, 또 흔한 이야기의 소재이다. 이 점을 극복할 수 있는 영화적인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깊이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 진부한 주인공들이지만,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표현을 하는지에 따라 많은 점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 것도 싫어하고, 듣기도 싫어하는 편이다. 뭔가 다르게 보이는 영화를 거칠게 만들기보다는 내가 공감할 수 있고, 감정이 살아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슬픈 사랑 이야기이지만 눈물을 경계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단지 슬프기만을 원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의 마지막이 한없이 슬프기만 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재의 입장에서도 민아를 만난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편집에서 잘렸지만, 영재가 민아의 엄마에게 하는 대사 중에 “고맙습니다. 민아를 만나게 해주셔서…”라는 말이 있다. 그런 게 영재의 감정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픈 추억이어도 행복한 순간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계속 살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슬프지만,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누군가가 신인감독치고 영화가 너무 안정적인 것 아니냐고 비판한다면, 어떻게 반론할 것인가. 그런 얘기 워낙 많이 들어서(웃음)…. 너는 왜 패기가 없냐는 식의…. 하지만, 내가 원하는 영화는 그런 쪽이 아니다. 그건 정말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이 영화를 한 이유이기도 하다. 깜짝 놀랄 일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보다는 뭔가 사람들이 알고 있고, 흔하다고 생각해도, 내가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 때는 달라질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는 대단하게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고. 조금씩 변화를 찾아가는 스타일이랄까? 그런데 안정적이긴 한가? 그렇다면 다행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