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에 저장된 기억을 지우거나 날씨를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문명이 발전한 미래사회. 천재 엔지니어 마이클 제닝스는 탁월한 기술력으로 많은 돈을 벌지만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일을 완성한 다음 작업중의 모든 기억을 강제적으로 지우고 살아간다. 친한 친구의 부탁으로 3년 동안 큰 프로젝트를 마친 그는 그동안의 기억을 지우고 1억달러에 가까운 대가를 찾으러 간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돈 대신 잡다한 물품만 잔뜩 들어 있는 봉투뿐이고, 그는 총 든 사나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지난 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사회를 연 존 우(오우삼) 감독의 신작 〈페이첵〉(한국개봉 2004년 1월20일)은 기술에 의해 미래를 알 수 있게 될 때 인류가 처하게 되는 위험을 경고하는 공상과학 영화다. 같은 원작자(필립 케이 딕)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가려진 기억과 드러난 미래의 충돌을 그리면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 영화에서 옷이 해어져 같은 양복을 47벌이나 갈아입으며 격렬한 액션을 연기한 마이클 제닝스 역의 벤 애플렉은 배우가 되기 전부터 방에 〈첩혈쌍웅〉 포스터를 걸어두었다는(지금까지도!) 존 우 감독의 열혈팬.
아직도 내방엔 <첩혈쌍웅> 포스터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존 우 감독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존 우와 함께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큰 사건’이었다. 〈첩혈쌍웅〉이나 〈첩혈속집〉 등 존 우 감독의 영화들은 액션영화에 대한 내 시야를 바꾸어놓았다.”
〈매트릭스〉 이후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아시아의 액션영화를 차용했듯 〈페이첵〉에서도 총이 아닌 봉을 가지고 격투가 벌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연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소룡처럼 느껴졌는가 하는 질문에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할리우드가 아시아 영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총질만 난무했던 할리우드 영화의 액션이 새롭게 정의되고 액션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수준도 매우 높아졌다. 〈와호장룡〉에서 보았듯이 아시아 영화는 액션을 마치 발레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할리우드 액션 우아하게 바꿔놔
〈데어데블〉 〈체인징 레인스〉 등 근작들과 〈페이첵〉을 통해 벤 애플렉은 초기의 지적이고 온순한 이미지에서 액션스타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는 “많은 이들이 주목한다는 면에서 액션영화는 매력적이지만 액션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며 “내 작품 이력을 쭉 돌아보면 10종 경기 선수처럼 다양한 역을 해왔고 할 수 있다는 게 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0㎝ 가까운 키에 팔뚝 하나가 머리통만한 외모는 ‘딱’ 액션배우지만 실제 성격은 ‘근육맨’과는 거리가 멀고 전작 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인물을 꼽는다면 액션영화의 캐릭터보다는 데뷔작 〈체이싱 아미〉의 소심한 만화가나 〈굿 윌 헌팅〉의 평범하고 우정을 지키는 청년 같다고. 영화에서처럼 미래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무엇이 궁금한가 하는 질문에는 “미래는 모르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본을 보고 이 영화가 잘될지 망할지 확인해서 ‘폭탄’을 피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을 것 같다”고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