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으로서의 나’를 발견한 <프리다>의 프리다 칼로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1907∼54)는 진정 외로운 예술가였다. 아마 역사상 가장 외로운 예술가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외로웠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늘 복잡하게 요동쳤다. 아니, 그렇게 복잡하게 요동쳤기에 그의 외로움이 더욱 깊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프리다>는 바로 그 진정한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선 영화 전체에 대한 개인적인 평을 하자면, 한마디로 맛있는 멕시코 요리를 먹은 듯 매우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이야기의 구성도, 주인공 샐마 헤이엑의 연기도, 간간이 등장하는 초현실주의적인 화면 기법도 모두 짜임새가 있고 알찼다. 예술가 영화, 특히 미술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미술 작품은 기본적으로 정지돼 있는 이미지여서 이를 동영상으로 담는 것 자체에 한계가 있다), 감독 줄리 테이머의 연출력은 높이 칭찬해줄 만하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이 지닌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을 뿐 아니라(초현실주의적인 측면에 약간 치우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이를 영화적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작과 유사하게 만든 모작들 위주로 찍다보니 프리다의 힘있는 원작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원작을 동원하자니 초현실주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예술 자체보다 화가의 삶에 더 무게를 둔 영화인 만큼 이는 충분히 ‘용서’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의 소외된 상(像)에 귀기울이다
영화는 말년의 프리다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보기 위해 침대에 누운 채 차에 실려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고개를 돌린 소녀 프리다가 뛰어가는 것으로 장면이 바뀌는데, 바로 이 여학생 시절에 프리다는 그의 운명적인 사랑 디에고 리베라(1886∼1957)를 처음으로 만나고 또 후유증으로 평생 심하게 고생하게 되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영화에는 언급이 없지만, 교통사고 이전에도 프리다는 장애가 있었다. 여섯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약해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에게 “나무다리 프리다”라는 놀림을 받고 자랐기에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소외된 상(像)에 눈을 떴다. 교통사고는 프리다가 18살 때, 그러니까 명문 국립예비학교 학생 시절 타고 가던 버스가 난폭 운전으로 맞은편 전차를 피하다가 발생했다. 이때 그는 대퇴골과 갈비뼈가 부러졌고, 골반은 세 군데, 왼쪽 다리는 열한 군데가 골절됐다. 오른쪽 발은 아예 으스러졌는가 하면, 왼쪽 어깨는 탈구됐다. 버스 난간 쇠파이프가 오른쪽 히프를 관통해 질을 뚫고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당시 프리다의 상태는 처절했다. 이 사고 이후 그는 마흔일곱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두번의 유산 경험도 이 사고의 후유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프리다에게 건강의 회복이란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1925년 12월5일의 일기에 “유일한 희소식은 이제 내가 참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라고 썼듯 참을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그녀에게는 회복이었다. 사고 이후 침대에 오래 누워 있는 동안 칼로의 어머니는 천장에 큰 거울을 달아주었다. 바로 이 거울을 통해 그는 그만의 평생 모델, 곧 자신의 외로운 이미지를 발견한다. 영화에서도 이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것으로 프리다가 화업에 들어서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 자화상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프리다의 다른 자화상들 역시 그의 인생의 다양한 고비를 표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이혼의 고통을 나타낸 <두 사람의 프리다>와 <잘라낸 머리가 있는 자화상>, 망가져가는 육체의 고통을 표현한 <부서진 기둥> 등 영화 속의 그의 자화상은 연속되는 불행 속에서 수없이 고독과 소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 영혼의 힘겨운 실존을 인상 깊게 전해준다.
병상에서 회복된 프리다는 화가가 될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래서 여학생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을 몰래 훔쳐봤던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갔다. 이 만남은 프리다의 재능에 대한 디에고의 감탄과 더불어 두 사람의 관계가 친구 사이로, 친구 사이에서 부부 사이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결혼 당시 프리다와 디에고는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이란 말처럼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한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과 배신, 환멸, 다시 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를 위한 가장 완벽한 조합이었다.
결혼 무렵 프리다는 21살, 디에고는 42살이었는데, 프리다는 아직 화가로서 명함을 내밀기도 이른 시점이었고, 디에고는 벽화운동의 기수로서 멕시코의 문예부흥을 주도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미술사는 당시 멕시코 벽화운동의 3대가로 디에고 외에 시케이로스(1896∼1974), 오로츠코(1883∼1949)를 꼽는다. 지금도 그 명성이 마르지 않는 이 3대가 가운데 디에고와 시케이로스는 공산주의자였고, 오르츠코는 탈이념적인 인물이었다. 같은 공산주의자였다고 해도 디에고는 완만하고 영구적인 혁명을 지지함으로써 트로츠키의 편에 섰고, 시케이로스는 옛소련이 ‘프라하의 봄’을 잔인하게 짓밟았을 때 이를 적극 찬양한 데서 드러나듯 완고한 스탈린주의자였다. 둘의 정치적 갈등은 영화에서도 격정적인 토론장면으로 형상화되는데, 디에고가 정부에 탄원해 트로츠키의 멕시코 망명을 성사시킨 반면,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시케이로스는 트로츠키 암살 음모에 적극 가담했을 정도로 둘의 지향은 달랐다. 시케이로스의 행적과 관련해 노벨상을 수상한 멕시코의 문호 옥타비오 파스는 “화가가 어떻게 손에 피를 묻힐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처럼 격변과 위대한 예술의 시대를 살면서 프리다 역시 자신만의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의 성취는 남편과 다른 멕시코의 남성 거장들에 비해 당대에는 그리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였다. 그의 예술이 이뤄낸 가장 위대한 성취는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나, 주변으로서의 나의 발견이었다. 프리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가장 중심적인 소재로 그리면서 여성으로서 자신 안에 녹아 있는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모순, 고독, 소외를 묘사했다. 이것은 서양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1960∼80년대 이후 비로소 그 진가가 발견될 수 있었던 것으로, 프리다의 예술은 20세기 전반 여성미술의 가장 위대한 성취였다고 할 수 있다.
멕시코 예술가들의 영혼이 살아온다
여성주의 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프리다의 지향 밑바탕에는 이를테면 ‘대모’(Great Mother)적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주검과 쓰레기를 받아들이고 짓밟힘을 당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생명을 움틔우고 그 순환을 주관하는 지구처럼 대모는 모든 인격적 존재의 탄생과 순환을 주관하는 힘이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곧 아버지와 부성조차 그 근본은 대모로부터 나온 것이다. 닭과 달걀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일지 모르나, 여성과 남성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답하기가 어렵지 않다. 대모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말이다. 프리다의 그림은 바로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대모의 고통과 외로움을 노래한 시이다. 영화 <프리다>를 보는 중에 얼핏 ‘성육신’한 신 예수의 이미지가 지나가는 것은 바로 이 대모의 현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중요하게 서술되는 그림이 아니지만, 프리다가 그린 <우주와 지구, 나, 디에고 그리고 애견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에서 우리는 대모의 슬픔을 진한 공감으로 맛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우주는 양성적인 존재로서 대모의 이미지를 띠고 있고, 지구는 여성이다. 남편 디에고를 안은 칼로 자신의 자화상은 우주 그리고 지구와 함께 고통을 당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형상화돼 있다. 칼로의 눈물과 가슴이 팬 지구의 젖이 방울방울 흐르면서 그 슬픈 ‘여성사’의 표정을 선명히 드러내 보인다. 디에고가 어린아이로 그려진 모습이 이채로운데, 이마 한가운데의 큰 눈과 손에 쥔 불은 통찰력과 이성, 문명, 재능 등을 상징하는 것일 게다. 이 상징들은 디에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사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위대함이란 가치의 독점적인 소유자로서 남성 일반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껏 역사는 남성이라는 미숙한 어린아이에게 이성과 문명이라는 위험한 칼을 내맡겼는지 모른다. 그로 인해 비록 어머니 대지가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려왔지만 그래도 어머니 대지의 종국적 결단은 늘 사랑의 포옹이었다. 개인적으로 프리다는 디에고의 숱한 동물적인 애정행각(그 가운데는 프리다의 동생 크리스티나와의 간통도 있었다)과 자기중심적인 행위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영화에서도 엿보이듯 프리다가 트로츠키와 잠시 연정을 나누게 된 것도 그런 상처의 반작용 탓이 컸다. 하지만 그는 끝내 디에고가 자신의 영원한 사랑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 대지의 사랑이고 포옹이었다. 프리다가 쓴 다음과 같은 시는 디에고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인데.”
미학적인 측면에서 영화 <프리다>는 기억해둘 만한 성취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인상적인 초현실주의 풍의 화면 처리이다. 그림이 눈물을 흘리는 등 살아 움직인다든지, 사건 전개를 몽타주 혹은 콜라주 기법으로 처리한 것, 해골들이 수술장면을 주도하는 모습(칼라베라스라고 불리는 해골은 특히 멕시코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미지로, 죽은 이들을 기념하는 날에 반드시 등장하는 멕시코 민중미술의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등은 만화적인 비약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영화와 무척 어울리면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프리다의 삶을 생생히 부각시켜준다. 두 번째는 교통사고 직후 만신창이가 된 프리다의 몸 위로 금가루와 유리조각들이 꿈처럼 떨어지는 장면이다. 삶과 죽음, 성과 속이 교차하는 듯한, 매우 종교적이면서도 미학적인 이 이미지는 프리다의 삶과 예술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세 번째는 무척이나 감미롭고 열정적인 영화음악이다. 멕시코 전통음악과 라틴풍 음악을 섞어 만들어 영적 호소력이 강한 이 음악들은 마치 그 시기 멕시코 예술가들의 영혼이 살아와 우리와 다시 만나는 것 같은 환각을 준다. 이 모든 요소들이 이 영화의 ‘종합예술’적인 장점을 잘 살려주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일기에 적었던 프리다. 영화는 그 치열했던 삶에 대한 찬미가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