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전선(戰線)을 따라 미리 보는 <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 휘날리며>는 여전히 미궁이다. 게다가 개봉은 2004년 2월6일로, 애초 일정보다 20일가량 밀리면서 궁금증은 더 커졌다. 내년 상반기 한국영화 최대 화제작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 거대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195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두 형제의 비극이라는 짤막한 문장 이외에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순제작비 146억원을 들인 스펙터클과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스탭들의 팀워크가 만들어낸 자장이 강제규 감독의 전작 <쉬리>의 여진만큼 강력할지 또한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실마리가 없진 않다. 강 감독은 수차례 이번 영화에서 ‘전투가 아닌 전쟁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말해왔다. 볼거리에 앞서 역사적 개연성과 감정의 드라마가 중요한 영화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그 전개과정 자체가 드라마틱한 구조를 갖고 있다. 남하와 북진, 그리고 다시 교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떠올려보라. 어쩌면 연속적인 전투는 두 형제의 감정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걸 전제하고, 이제 전투 속으로 들어가보자. 상상을 더하면 그동안 감춰온 비극의 실루엣이 드러날지도.
1950년 6월, 종로에서
역사 속으로 1950년 6월24일, 인민군 949 군분대는 38연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한다. 공격 개시가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움직임이다. 6월25일 새벽 4시40분, 서쪽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중대 규모의 한 인민군 부대는 23발의 사격만으로 첫 전투를 마쳤을 만큼 남하는 손쉬웠다. 6월27일 새벽 3시,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열차로 서울을 서둘러 떠나야 했고, 이튿날 새벽 1시 서울에는 인민군 전차부대가 진입한다.
스토리 종로통 어귀에 좌판을 벌이고 구두 수선공으로 살아가는 진태(장동건). 배움없는 까막눈이지만, 수재 소리 듣는 동생 진석(원빈) 때문에 근사한 차림의 양복신사가 부럽지 않다. 게다가 말을 잃었지만 가슴은 따뜻한 어머니(이영란), 곧 결혼을 앞둔 약혼녀 영신(이은주)까지, 그의 곁에 있다. 그러나 초여름의 난데없는 포성은 이들 가족에게서 웃음을 빼앗는다. 피난길에서 진석은 강제 징집되고, 진태가 이를 막기 위해 나서지만 그도 전선으로 끌려가는 처지가 된다.
팁1 기차 피난, 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황톳길에 늘어선 행렬이 떠오르지만, 기차를 타기 위해 아우성치는 사람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극중 대구역사로 쓰인 전남 구 곡성역을 천신만고 끝에(제작진은 적당한 역사를 물색하려고 중국까지 갔었다) 찾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난관은 또 있었다. 선로가 노후하여 증기기관차를 공수할 수 없게 된 것. 1대밖에 없는 기관차를 분해할 수도 없으니 새로 만들 수밖에. 3억7천만원을 들여 만든 5량 크기의 증기기관차는 촬영 당시 스탭들의 자랑거리요, 애정대상이었다고.
촬영장에서는 “종로 쫌 어떻게 안 되나?” 강제규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속이 탔다. 종로장면은 9개월 동안의 촬영기간 중 거의 마지막에 찍은 분량. 부천의 <야인시대> 세트를 활용했는데, 드라마 방영이 연장되어 조악한 세트를 손볼 여유가 많지 않았다. 화신백화점 사거리를 비롯해 그럴싸한 1950년대 종로 거리를 재현하려고 했던 제작진에게 주어진 시간은 10일. 세트 일대를 흙으로 덮고, 상점의 경우 입체적 공간으로 변형하기 위해 애썼지만 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러닝타임으로만 따지면 길지 않다. 하지만 진태와 진석의 행복했던 시절을 전경화한 이 부분이야말로 이후 두 형제가 겪게 되는 갈등의 굴곡을 설명하고, 강조하는 장면이다. 그러니 제작진으로서도 허투루 찍을 수는 없는 일. 홍경표 촬영감독은 “자료를 보면 꾀죄죄한 줄만 알았던 당시 민중은 좌우익 대립이라는 정치적 현실과 상관없이 활기에 넘쳐 있었다”면서 “군중의 활기있는 생동감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세트의 미진함을 메웠다고 말한다.
핵심포인트 저녁밥 짓는 마을의 평온함은 원초적인 그리움의 풍경이다. 따뜻한 브라운 느낌으로 채색된 종로장면은 앞으로 두 형제 앞에 형벌처럼 내려질 참혹한 전쟁의 참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싸움이 치열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종로 거리에 흔히 있을 법한 현수막 하나 걸지 않았다. 포근함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낙동강에 서다
역사 속으로 “부산으로의 철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살육을 초래할 것이다.” 7월29일, 궁지에 몰린 낙동강 일대의 전 연합군 병사에게 내려진 경고다. 8월4일, 퇴각을 거듭하던 연합군은 마지막 방어선인 부산교두보를 중심으로 완강하게 저항한다. 이로 인해 부산을 기점으로 남북 160km, 동서 80km에 이르는 부챗살 모양의 저지선은 남북 양쪽이 삽시간에 쏟아낸 거대한 혈류로 변했다.
스토리 쏟아지는 포탄 한가운데 떨궈진 진태와 진석. 형제는 탈영을 계획하나 또 다른 탈영병이 아군에게 참혹하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서 주저한다. 심장이 약한 동생을 후방 병원에 보내기 위해 진태는 대대장과 모종의 거래를 하게 되고, 진석은 위험한 상황에 돌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형의 달라진 모습이 의아스럽다.
촬영장에서는 필사의 공격과 방어가 오가는 낙동강 방어선의 상황을 제작진은 혼란 그 자체로 묘사하고 싶었다. 강제규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군과 군이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군과 민이 섞여 싸우는 형태였다”며 “숙련되지 않은 투박한 그러나 감정과 감정이 맨몸으로 부딪히는 과정”을 전투에 담으려고 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는 탄약통을 들고 가다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신발이 벗겨진지도 모르고 도망가기 바쁜 상황들이 이어진다. 경주에서 주로 촬영이 이뤄진 이 장면에서 방어선은 진태, 진석 두 형제가 벌이는 갈등의 크레바스이기도 했다. 방어선을 경계로 고립된 두 형제의 다툼은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동생을 후방으로 보내기 위한 진태의 무모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두 형제는 점점 멀어진다. 진태가 무공을 세우기 위해 기습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홍경표 촬영감독은 밤장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절 보조조명 없이 찍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은밀한 움직임으로 본격적인 첫 전투를 묘사한 것. 전투장면을 위해 밤마다 고지에 올라야 했던 강제규 감독도 이 장면 촬영에 이르러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팁2 대검과 삐라 국방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탓에 소품 고증 또한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특히 인민군쪽 자료는 전무해서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한국전쟁 관련 서적 1권에 실린 사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삐라의 경우는 물어물어 소장자를 찾은 다음 양해를 구하는 방식을 썼다. 당시 쓰였던 M1 소총 대검, 무전기 등의 전투장비 또한 골칫거리. 소품팀장이었던 정상혁씨는 “국방부쪽에서 협조해줬더라면 간단히 샘플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개인적으로 공부를 한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다른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핵심포인트 카메라의 움직임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제작진에 따르면 카메라의 워킹 또한 이때부터 격렬해지고, 거칠어지고, 가빠진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첫 전투의 상황을 개각도 촬영으로 보여주되, 중간중간 렌즈 시야를 45도로 축소해 인물들의 움직임을 분절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심리를 전달하려고 했다고 하니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