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제작발표회
2003-12-15
글 : 박혜명
사진 : 오계옥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지워라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제작발표회가 지난 12월10일 남산에 위치한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렸다. 2004년 4월23일부터 5월2일까지 10일간의 일정을 확정한 전주영화제쪽은 올해의 디지털 3인으로 한국의 봉준호, 중국의 유릭와이, 일본의 이시이 소고 감독을 엮었다. 전주영화제의 시작과 함께한 이 프로젝트는 잘 알려진 대로 5천만원의 제작비, 30분의 러닝타임, 디지털카메라 촬영이라는 조건으로 감독 3인의 영화를 모은다. 이날 제작발표회에는 세명의 감독과 민병록 집행위원장, 정수완 프로그래머, 김은희 프로그래머 등이 참여해 내년에 선보일 프로젝트의 모양새를 공개했다. 김은희 프로그래머는 “프로젝트와 관련해 특별한 주제를 주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이번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감독들은 모두 현실과 픽션이 혼재된 세계를 구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렇더라도 작품에 대한 감독의 재량권은 철저히 보호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각난 텍스트로 큰 그림을-봉준호 <모자이크 다큐멘터리: 인간 조혁래>

한영애의 뮤직비디오 작업, 한국영화아카데미 20주년 기념 디지털 단편 프로젝트 <이공(異共)>,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까지 올해 벌써 세 번째 외도를 즐기고 있는 봉준호 감독은 일명 ‘모자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출한다. 이 말은, 페이크다큐멘터리 혹은 모큐멘터리처럼 다큐멘터리를 위장한 픽션 형태를 띠게 될 단편이면서 여러 종류의 영상물들을 조각조각 긁어모아 붙인다는 점에서 본인이 “급조한 용어”다.

<모자이크 다큐멘터리: 인간 조혁래>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이란 시간 동안 조혁래라는 인물의 모습을 띄엄띄엄 쫓는다. 중앙대 영화과 학생의 미완성 다큐멘터리부터 국민은행 CCTV 화면, 회갑잔치를 촬영한 캠코더와 어느 외국인의 카메라까지 곳곳에 담긴 조혁래의 푸티지(footage)들을 긁어모아 한 인간이 겪은 사건들과 그에 따른 변화를 풀어 보인다. 당연히, 조혁래는 가상의 인물이며 CCTV 자료화면이나 학생의 미완성 다큐멘터리 모두 가짜다. “나도 우리 애가 유치원 다닐 때 수업받던 모습을 찍어놓은 파일을 몇개 가지고 있다. 요즘은 유치원 홈페이지를 통해 아이들의 수업장면을 부모가 실시간 볼 수 있고 다운로드도 받는다. 디지털 시대의 텍스트란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존재하는 텍스트들을 긁어모으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이처럼 여러 가지 영상소스들이 뒤섞일 봉준호 감독의 모자이크 다큐멘터리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 조혁래에 관한 부분이다. 5년 동안 한 인간이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조금 놀라운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 단편은 한국사회에 깃들어 있는 “불황의 히스테리”를 단면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규모가 작고 개인과 공공사회가 분리되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 한 개인의 뒷모습을 쫓는다는 건 결국 사회의 모습을 끌어들인다는 의미다. 이번 프로젝트로 처음 디지털 매체를 작업하게 되는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 때 가뿐하게 포토숍을 마스터한 것처럼 디지털 작업도 금세 배울 수 있지 않겠냐며 자신만만해한다. 제출기한, 정해진 러닝타임, 제한된 예산 등 여러 조건들이 빡빡하지만 이런 데서 오히려 크리에이티브가 발생하기도 한다며 여유도 보인다. 이 정도면 그의 거짓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뻔뻔하게 눙을 칠지, 감이 잡힐 듯도 하다.

픽션과 다큐의 혼합- 유릭와이 <Dance Me to the End of Love>

중국의 유릭와이 감독은 지아장커 감독의 카메라감독 출신으로 유명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한국에 많이 왔다는 유릭와이 감독의 최근작 <명일천애>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바 있다. 세계종말 이후 독재자가 지배하던 근미래의 사회체제가 붕괴되면서 무력하게 흩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담은 이 영화를 두고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작고 섬세한 인간의 세부묘사가 돋보이고, 비주얼을 통해 주제의 철학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은 유릭와이의 첫 디지털 장편이라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와도 멀지 않은 지점에 있다.

<Dance Me to the End of Love> 역시 <명일천애>와 비슷하게 근미래 중국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Plasticity’라고 이름붙은 이 도시의 지하에는 비밀리에 영업 중인 댄스홀이 있다. 이 홀에서 빈 맥주캔만 수거하면서 살아가는 남자의 이름은 기린. 그가 맥주 이름을 갖게 된 이유도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아무도 그의 본명이나 출신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고아이고 선천적 농아다. <명일천애>에서처럼 우울한 미래가 배경으로 깔리고 이 속에서 기린은 불법 몽고 이민자 란란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명일천애>의 에필로그쯤 될 수도 있다고 감독이 말하는 이번 단편은 실제 댄스홀 속에 들어가 실제로 그곳에 춤추러 온 사람들 틈에 배우들을 끼워 넣어 촬영된다. 이것이 유릭와이 감독이 생각하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혼합이다.

지아장커 감독의 <임소요>와 전작 <명일천애>에서 디지털 작업을 경험한 유릭와이 감독은 디지털만이 구현할 수 있는 미학적 가능성들을 높게 보고, 35mm가 구축해놓은 미학을 넘어서서 디지털만의 미학적 접근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Dance Me…>는 이러한 유릭와이 감독의 생각을 전작에 이어 고스란히 반영해줄 증거자료로 남게 될 것이다.

분열된 자아의 혼돈-이시이 소고 <경심>

도호사의 지원으로, 35mm필름으로 상영됐던 니혼 아트 칼리지 졸업작품 <미쳐버린 썬더로드>(1980)는 영화에서 표현된 폭력의 수위가 문제를 일으켰었다. 이시이 소고 감독의 과감하고 독특한 스타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버스트 시티> <미친 가족> <엔젤 더스트> 등으로 이어진 일본의 펑크세대가 열광하는 이시이 감독의 스타일은 초자연적이면서 강력하고 스펙터클하다. 2000년에 연출한 시대극 <고조>와 <일렉트릭 드래곤 8만 볼트> 이후 최근 <데드 엔드 런>의 일본 상영을 막 마친 이시이 감독은 전주영화제의 러브콜이 시의적절했다고 말한다. “시나리오 문제로 차기작 계획을 접었던 차다. 시점상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제안을 받았고 마침 DV 홈비디오로 드라마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 <경심(鏡心)>(가제)은 한 여배우를 중심에 놓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어떤 것이 영화에서는 보일 것 같다고 말하는 이시이 감독은 여배우의 마음을 거울로 활용한다. 여주인공의 분신처럼 여겨지는 또 다른 여자가 등장해서 “당신의 세계는 당신의 마음의 거울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알수 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말만큼이나 줄거리가 난해한 이시이 감독의 프로젝트는 감독 본인도 어떻게 만들어질지 알 수 없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지도가 없는 곳을 찾아가서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결과가 좋으면 물론 좋지만 결과보다는 일단 가보면 뭔가 있을 것이고 가보기 전에는 전혀 모른다는 생각으로 부닥쳐가면서 만나는 것들이 나에게 더 매력적이다.”

이시이 소고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여배우가 느끼는 감정들이 과연 연기인지 혹은 정말 날것 그대로인지 보는 이들에게 혼란을 주고 싶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흐리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디지털 작업을 해왔다는 이시이 감독은 개인적으로 아날로그 필름 작업을 훨씬 선호한다. 이번 작업이 그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제작기한과 예산, 러닝타임, 수단 등 제한된 조건하에서 난생처음 작업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색다른 환경 속에서 이시이 감독은 이제까지 보여온 스타일의 연장선을 만들어 보인다는 또 하나의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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