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오우삼과 벤 애플렉 합작 <페이첵> LA 현지 시사
2003-12-16
글 : 문석

“우리는 미디어, 정부, 거대 기업, 종교 집단, 정치 집단에 의해 조작된 가짜 리얼리티 속에서 살고 있다.” SF작가 필립 K. 딕의 이 말은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오우삼 감독의 신작 <페이첵> 시사회가 열리는 LA에서도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보수 미디어와 공화당 정부, 군수산업과 기독교의 합작으로 전쟁을 일으킨 이 나라는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공항에서부터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당하며 불안과 수모를 겪어야 했던 이방인들의 현실은 이곳에 사는 이들에겐 비현실인 듯했다. 하긴, 여기는 소수 인종에 대한 ‘배려’를 ‘특혜’라며 현실을 바꿔친 아놀드 슈워네제거 주지사의 캘리포니아 아닌가. 게다가 슈워제네거는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탈리콜>의 주인공이었으니 이 ‘리얼리티’는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새삼 필립 K. 딕의 혜안을 느끼는 와중,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6번째 영화이자 오우삼과 벤 애플렉의 합작품 <페이첵>은 세상에 실체를 드러냈다. 영화의 주인공 마이클 제닝스(벤 애플릭)는 어떤 업체가 신제품을 개발하면 이를 분해해 그 기술을 파악, 모방하는 뛰어난 ‘역 엔지니어’다. 그의 진짜 재주는 베낀 것보다 한 단계 나은 제품을 만들어낸다는 점. 영화 첫머리에서 그는 한 기업이 만든 입체 모니터를 가져다가 아예 모니터 없이도 3차원 영상이 투사되는 신기술을 개발한다. 신제품 개발이 끝나면 그를 고용한 기업은 이 ‘영업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하는데, 제닝스에게서 작업 기간 동안의 기억을 지우는 일이 그것이다. 얼마 뒤 제닝스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올컴사의 대표 지미 레트닉(애론 애커트)으로부터 3년에 걸친 초대형 프로젝트를 주문받는다. 3년 뒤 프로젝트를 마치고 기억을 지운 제닝스는 보수로 받기로 한 9천여만달러를 포기한다는 계약서에 직접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액 대신 그에게 남겨진 거라곤 담배, 클립, 돋보기, 지하철 표, 쇠구슬 19개의 잡동사니가 든 노란 종이봉투뿐이다. 설상가상으로 FBI는 그를 붙잡아 3년간 그가 무슨 작업을 했는지 캐묻는다. 이제 그는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연인 레이첼(우마 서먼)의 도움을 받으며 다양한 적들에 맞서야 한다.

<페이첵>은 필립 K. 딕이라는 아버지의 후손답게, 충분치는 않지만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제닝스의 딜레마는 기억이 전혀 없는 가운데, 미래의 자신이 제공한 실마리를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미래를 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 ‘과거의 제닝스’는 이 기계로 닥쳐올 자신의 위험을 본 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19개의 아이템을 ‘현재의 제닝스’에게 보낸 것이다. 담배연기를 뿜어 화재경보가 울리게 함으로써 FBI를 탈출하고, 쇠구슬을 던져 출입통제 시스템을 혼란에 빠뜨린 뒤 올컴사에 잠입하는 등 모든 아이템은 적재적소에서 사용되도록 구성됐다. 이러한 설정은 1953년 발표된 동명의 원작 <페이첵>과 비슷하다. 원작에선 쪼개진 포커 칩, 버스 토큰, 물품보관 영수증 등 7개의 아이템을 이용한다는 정도가 다를 뿐 이들 아이템을 이용해 제닝스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는 점은 같다.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

사실, 이 소설은 필립 K. 딕 작품 중에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질문이 적은 축에 속한 것. 30쪽가량의 전체 분량 중 상당 부분이 제닝스의 ‘액션’에 할애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가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점에 주목한 탓으로 보인다. 근미래라곤 하나 그러한 시대 배경이 그리 중요하지 않고, 캐릭터의 심리와 행동에 집중하는 탓에 장르적 변용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렛 래트너와 캐스린 비글로를 거쳐 연출자로 결정된 오우삼은 <페이첵>을 SF가 아니라 스릴러와 액션이라는 장르의 코드로 풀어냈다. “나는 단지 이 영화를 나의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다”는 오우삼의 설명처럼 이 영화에는 휘황찬 CG나 과장된 액션 대신 곤경에 처한 한 남자의 고군분투가 담겨 있다(그는 <페이스 오프>를 만들 때도 SF 냄새가 물씬했던 시나리오의 배경을 현대로 바꾼 바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SF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다… (SF)는 엄청 발전된 테크놀로지와 연관된 미래 우주에서의 모험이나 전투, 또는 전쟁이 아니다”라는 필립 K. 딕의 본디 의도를 제대로 구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다. 30년대 뮤지컬,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샘 페킨파와 함께 그의 마음속 만신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히치콕의 영화는 여러 군데서 인용된다. 그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새> <싸이코>의 장면을 그대로 이 영화 속에 구현하려 했고, 벤 애플렉에게 <북북서…>의 캐리 그랜트와 같은 회색 정장을 입히도록 의상 담당자에게 주문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히치콕적인 요소는 제닝스라는 캐릭터가 히치콕의 여러 영화에서 그랬듯, ‘잘못된 누명을 쓴 사람’(the wrong man)이란 점이다.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히치콕의 주인공은 언제나 서스펜스와 유머를 만들어냈다.

액션 영웅에 향기는 잃고

오우삼과 필립 K. 딕, 히치콕, 그리고 벤 애플렉, 환상적일 듯 보이는 이들 재료의 조합은, 그러나 그리 맛깔스럽지 못하다. 정부의 통제와 기업의 횡포 사이에서 희생양이 돼버린 한 남자의 절박함,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라는 이중자아의 문제 등 원작의 매력은 세계를 구하려는 또 하나의 액션 영웅의 등장으로 향기를 잃었고, 누명을 쓴 사나이의 분투란 히치콕적 모티브는 아이템을 하나씩 꺼내 위기를 극복하는 맥가이버식 해결 방식에 빛을 잃었다. 능글맞으면서도 섹시한 남성미를 가진 캐리 그랜트의 풍모 또한 단순해 보이는 우람한 근육질의 청년이 따라잡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만약 <페이첵>이 오우삼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더 좋게 보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에서 오우삼은 보이지 않는다. 피범벅 총격전이나 발레 액션이 없다는 불평이 아니다. 형언할 수 없이 웅장했던 감정의 리얼리티가 빠졌다는 말이다. 활활 타오르는 비정한 운명의 수레바퀴와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 폭발의 임계는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이 권총을 맞겨누는 장면과 흰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장면만이 맥풀린 실소와 함께 녹슨 간판처럼 등장할 뿐이다. “앞으로는 폭력적인 영화를 만드는 대신 서로 이해하며 살 수 있도록 돕는 이야기를 생각해야 한다”는 9·11 이후의 심경 변화와 “이젠 나이가 들었나보다”라는 고백을 고려해도 <페이첵>의 오우삼은 너무 나간 듯 보인다. 만약 그가 할리우드 시스템에 안주하며 낡아빠진 장르의 공식을 되풀이한다면 그 또한 필립 K. 딕이 경계한 ‘가짜 리얼리티’에 일조할 뿐이리라. 미래를 보여주는 기계는 오우삼에게 더욱 절실한지도 모른다.

오우삼 감독 인터뷰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다"

원작과 영화는 어떻게 다른가.

이 영화 전에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단지 <블레이드 러너> <토탈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본 적이 있는데 아주 매력적이었다. 캐릭터들이 너무 비극적이고 슬프게 묘사되어 있었다. 반면 나는 SF영화 전문이 아니다. 위대한 천재 스필버그나 장인이라 할 수 있는 리들리 스콧 감독과 나 자신을 비교할 수는 없다. 나는 단지 이 영화를 나의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고, 단순한 이야기로 만들려 했다. 나는 SF에 전문이 아니며, 컴퓨터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튜디오에 미래적인 요소를 조금만 남기고 대폭 줄이자고 제안했다. 대신 늘 그래왔듯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앨프리드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로 만들려고 했다.

어떤 점을 히치콕의 영화에서 차용했나.

히치콕의 영화에서 끌어들인 것은 세 가지이다. 벤 애플렉이 전철에서 쫓기는 장면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캐리 그랜트가 허허벌판에서 비행기에 쫓기는 장면을 가져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두 마리의 새는 영화 <새>를, 서스펜스 장면들은 영화 <싸이코>를 느끼게 하려 했다.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히치콕으로부터 배웠다. 히치콕의 작품들은 단지 서스펜스영화일 뿐 아니라 로맨스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아주 로맨틱하고 유머도 많이 담겨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행복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세상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언제나 세상에는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으며, 좋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었다. 특히 현재 홍콩, 대만, 일본 등지에 많은 사회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너무 빨리 삶을 포기하는 일까지 있는데 나는 그게 서글펐다. 그들은 희망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나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에선 오우삼적인 요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영화에서 신경쓴 점은 현실성과 설득력이었다. 주인공은 평범한 컴퓨터 엔지니어다. 나는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심플한 영웅을 만들고 싶었다. 액션 또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가 벤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순수하고 겸손해 보인다. 이 영화가 나의 이전 영화와 다른 것은 다종다양한 관객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웃음) 나는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또한 미국에서 만드는 모든 영화에서는 각각 다른 새로움을 시도하고 싶다.

당신의 영화에서는 비둘기나 서로 총을 겨누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당신의 서명이라고 생각해선가.

그렇다. 그건 오우삼의 사인이 됐다. 개인적으로 비둘기를 아주 좋아한다. 비둘기는 평화, 사랑, 순수를 상징하기 때문에 자주 사용한다. 다음 프로젝트들에도 계속해서 등장할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 계획인가.

내가 다음에 하려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액션 뮤지컬’이다. 난 7년 동안이나 이 영화를 만들기를 꿈꿔왔다. 이 영화는 1930년대 실존했던 한 미국 갱이 유명한 댄서를 사랑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액션은 춤같이, 춤은 액션처럼 만들려고 한다. <페이첵>처럼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극이 될 거다. 이를테면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과 봅 포시의 <카바레>가 섞인 작품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나오는 갱은 쌍권총으로 유명하다. (웃음) 두 번째 프로젝트는 파라마운트에서 만드는 톰 클랜시 원작의 <레인보우 식스>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반테러리스트팀을 그린다. 수년간 작업 중인 영화로 아일랜드인과 중국인이 철도에서 작업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 <The Devided>다. 워너브러더스 네트워크에서 방영될 예정인 TV시리즈 <로스트 인 스페이스>다. 문제가 많은 한 가족이 우주를 여행하면서 다시 가족의 소중함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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