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늙은 항해사처럼 완고한 영화다. 명색이 해양액션블록버스터인데 1억3500만달러를 웃도는 제작비를 메우겠다는 품어 마땅한 조바심은 보이지 않는다. 캐치프레이즈는 ‘러셀 크로 선장의 영웅담’이지만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19세기 영국 해군의 생활상과 교전 절차에 더욱 애착하고 있다. 물결에 편승하는 듯 자세를 취하면서, 고집을 관철한다. 쌓아올리는 데에도 즐기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는 구식의 재미를 굳게 믿는 이 영화의 감독은 피터 위어(60)다.
피터 위어는 언제나 자신이 만든 영화보다 덜 유명한 감독이었다.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위어의 초상을 뭐라고 딱 꼬집어 기억하기 어려운 이유의 하나는 그가 교차로에 서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유럽 예술영화의 기운이 물씬한 스타일로 호주 특유의 자연과 정서를 포착한 <행잉록의 소풍>으로 호주 뉴웨이브의 첫 파도를 일으킨 피터 위어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위트니스> <죽은 시인의 사회> <트루먼 쇼> 등의 주류 히트작을 내며 순항했다. 무릇 절충주의는 저널리즘의 구미를 강하게 자극하지 못하는 법. 각국의 내셔널 시네마를 논할 때에는, 흔히 “할리우드영화와 어떻게 다른지”를 기준으로 정체성을 규정하게 마련인데, 난처하게도 피터 위어의 영화는 호주 뉴웨이브 동기인 조지 밀러, 질리언 암스트롱 등에 비해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문법에 깊숙이 안겨 있다. 아니, 심지어 동시대 미국 감독이 만든 영화보다도 피터 위어의 영화는 스토리텔링의 황금기에 만들어졌던 할리우드 고전 장르영화와 더 닮아 있다(하다못해 섹스의 결벽한 묘사까지도 옛날 할리우드 윤리 강령인 헤이스 코드에 충실하다는 평판마저 있다). 결국 위어에게 가장 자주 따라붙는 별칭은 “까다로운 소재로 돈도 버는 감독”, “사려 깊은 상업감독”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피터 위어의 ‘사려’와 ‘상업성’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호주 뉴웨이브의 기수
피터 위어는 미스터리와 정체불명의 사물에 한없이 이끌리는 소년이었다. 해머호러영화를 좋아했고 누군가의 비밀이 감춰져 있을 듯한 지하실과 창고 뒤지기가 취미였다. 그러나 1950년대 시드니 주택가와 스코틀랜드에서 건너온 지 3대째라는 사실 외에는 드라마가 없는 위어 집안에는 이야깃거리가 철저히 부족했다. 2차대전에 참전한 아저씨 정도가 그나마 흥미로운 식구였다.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대학을 때려치우고 <갈리폴리>의 주인공처럼 무작정 배에 올랐을 때 피터 위어는 스무살이었다. 당시 피터 위어의 갈증은 모든 호주인의 보편적 갈증과 닿아 있다. 서구로부터의 지리적 고립, 식민의 경험으로 인한 역사의 부재, 수입 대중문화로 채워진 미디어는 피터 위어를 답답하게 했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60년대 청년 문화의 약속은 그의 기약없는 유럽 여행을 부추겼다.
영화는 애초 위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1년 반의 런던 체류를 마칠 즈음 피터 위어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취직하자고 결심했다. “당신이 발언하고 싶은 내용을 카메라로 찍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 문제에 대해 뭔가 행한 것이다”라는 식의 시대정신은 피터 위어의 관심을 영화로 돌려놓았다. 때마침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는 영화제가 융성해 다양한 필름이 소개되고 호주 정부가 자국 영화지원책을 가동한 시기였다. 피터 위어는 방송사 <채널 세븐>의 무대감독으로 출퇴근하면서 밤과 주말을 이용해 각본과 연기, 연출을 독학했고 단편 코미디를 찍었다. 그러나 위어가 진심으로 즐긴 작업은 연출로, 연기와 시나리오는 “달리 할 사람이 없어서” 하는 정도였다.
피터 위어는 1시간짜리 흑백영화 <홈즈데일>로 20대 중반에 입봉했다. 주말 싱글 투숙객만 받는 외딴 섬 여관에서 벌어진 불의의 살인사건을 그린 <홈즈데일>에 이어, 피터 위어는 교통사고를 고의로 유발해 얻은 폐차의 부품을 시 재정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는 기막힌 도시 이야기 <파리를 삼킨 자동차>(1973)로 주목받았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드라마의 설득력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초현실을 자연스럽게 가미하는 위어의 이같은 재능은 <해리슨 포드의 대탐험> <공포탈출> <트루먼 쇼>로 이어진다.
피터 위어에게 호주 뉴웨이브의 깃발을 쥐어준 작품은, <행잉록의 소풍>(1975)과 살인혐의로 기소된 호주 원주민의 사건을 맡은 백인 변호사의 고투를 그린 <라스트 웨이브>(1977)였다. 알 수 없는 내력을 지닌 호주의 자연과 토착민 앞에서 백인 이주민들이 느끼는 위화감과 매혹을 보여주는 두 영화를 피터 위어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에는 종종 두편의 영화가 소요된다”는 말로 한데 묶기도 했다. <행잉록의 소풍>은 피터 위어에게 처음으로 세계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1900년 밸런타인 데이에 벌어진 세 여학생과 한 여교사의 기괴한 실종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행방불명의 수수께끼를 끝까지 미결로 내버려둠으로써 모나리자의 미소와 같은 마력을 발했다(미국의 한 배급업자는 시간을 낭비한 분풀이로 영화 말미에 커피잔을 스크린에 내던졌다고 한다). <행잉록의 소풍>은 호러 아닌 호러다. 초당 32 내지 43 프레임으로 촬영한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소녀들은 손이 닿으면 움츠러드는 함수초나 라파엘 전파의 그림 속 여자들처럼 연약하고도 위험스러워 보이며, 팬플룻과 미세한 노이즈로 전율하는 사운드트랙은 흥분과 불안을 같이 자아낸다. 섹슈얼리티의 위협과 소녀들의 집단 패닉은 25년 뒤 우리 공포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장화, 홍련>까지 흘러들었다.
그러나 <행잉록의 소풍>을 봉인하는 장면은 소녀 미란다가 실종되기 직전 교사를 돌아보는 얼굴로 돌아가 정지하는 마지막 프레임이다. 순간 사태는 갑자기 분명해진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건 죽어 있건- 우리 곁에서 사라져간다. 따라서 실종은 메타포일 뿐이고 시체를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청춘의 꽃이 지는 찰나는, 피터 위어 감독이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의 마침표다. 적진으로 전력질주하다 총탄에 꿰뚫려 공중에 못박힌 청년의 아름다운 상체에서 숨을 멈추는 <갈리폴리>나 책상에 올라서서 선생님을 배웅하는 소년 에단 호크의 롱숏에서 눈길을 거두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엔딩은 특정한 스토리의 결론을 넘어, 생의 시간을 바라보는 피터 위어의 어떤 감각과 태도를 드러낸다.
‘성장영화’의 장인
피터 위어는 파라마운트에 의해 배급된 <갈리폴리>(1981)와 MGM의 부분투자로 제작된 <가장 위험한 해>(1985)를 거쳐 <위트니스>(1985)로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모략을 피해 아미쉬 공동체에 몸을 숨긴 강직한 경찰의 모험과 로맨스를 그린 <위트니스>에서 피터 위어는 현대 범죄스릴러의 서스펜스와 액션을 서부극의 구조와 모럴에 결합해 흥행과 비평에서 안심할 만한 성과를 냈다. <위트니스>에서 보통의 미국인을 양키와 영국인이라 부르며 고립된 생활을 영위하는- 그래서 호주를 연상하게 만드는- 아미쉬 공동체는 해리슨 포드로 인해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일을 바로잡은 형사는 도시로 돌아가고 여자는 마을에 남는다. 이질적인 두개의 문화는 충돌의 기억을 안고 다시 각자의 길을 간다. “미국의 중부 지역은 미스터리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 피터 위어가 오랜 시간 할리우드영화를 만들면서도 <그린 카드> 정도를 제외하면 영화 속 미국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뉴욕이나 LA를 좀처럼 스크린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은 기억할 만하다.
<행잉록의 소풍>과 <라스트 웨이브>가 한쌍이라면, <해리슨 포드의 대탐험>(1986)은 1993년작 <공포탈출>과 묶인다. <해리슨 포드의 대탐험>에서 현대 미국사회를 부정하고 순결한 문명을 건설하겠다며 정글로 들어간 과대망상적 발명가 앨리와 <공포탈출>에서 거대한 재난을 경험한 뒤 내면의 다른 소리를 듣는 맥스는 모두 강박적으로 진실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가족과 지인에게 고통을 안긴다.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를 묻지만 정답은 던져주지 않은 두 영화는 모두 박스오피스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장르와 인물의 연령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작품을 ‘성장영화’로 만들어온 피터 위어는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 이르러 엘리트 사립학교를 무대로 택해 <행잉록의 소풍>에서 그린 사춘기의 폐소공포증을 선명한 대립구도로 단순화했다. 로빈 윌리엄스가 분한 키팅 선생님의 수업은 지금 와서 보면 자율 교육이라기보다 감수성의 스파르타 교육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피터 위어 스타일의 몇몇 요소는 위어의 어느 작품보다 감상적인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잘 드러난다. 호주 시절의 초기작부터 <마스터 앤드 커맨더>까지 촬영감독 러셀 보이드와 보이드의 조수로 출발한 존 실이 도맡아온 피터 위어 영화의 카메라는 종종 자연의 풍경을 감정 표현의 도구로 능숙히 끌어들인다. 자연에 대해 이와 비슷한 감각을 보여주는 미국영화로는 테렌스 맬릭의 작품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고전음악을 감상적으로 구사하는 것도 위어의 연출 습관. <죽은 시인의 사회>을 본 관객이라면 휘트먼의 시구는 잊어도, 친구의 자살을 전해 들은 소년이 구토하던 순백의 눈밭과 백파이프 소리는 잊기 힘들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아쉬운 점은 돈보다 아이디어
수작이었으나, 피터 위어의 영화라기보다 작가 앤드루 니콜(<가타카> <시몬>의 감독) 영화에 가까워보였던 <트루먼 쇼>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초기작 <갈리폴리>의 세계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경쟁, 복종, 존중으로 엮인 인간 관계의 파노라마와, 삶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지탱하기 위한 액션이 펼쳐지는 세계로. 지난 10월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월드 프리미어에 참석한 피터 위어 감독은 온화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할리우드 감독이란 말의 의미가 타협하는 감독이라면 나는 해당없다. 내게는 트랙 레코드(과거 흥행성적)가 있고 덕분에 계약에 최종편집권을 명시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 아쉬운 점은 돈이 아니라 아이디어다.” 이러한 자부심과 자신감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쩌면 간단한 이야기다. 미스터리, 자연의 풍광, 품위있는 인간의 존중할 만한 투쟁, 성장드라마. 피터 위어가 애호하는 테마들은 할리우드의 해묵은 취향과 일치한다. 그 고전적 이야기를 옛 장인의 방식으로 정면 돌파하고 싶어하는 피터 위어는 할리우드보다 더 할리우드적이라서 두드러지는 이방의 감독이다. 할리우드와 관객의 입맛이 변한 뒤에도 아마 피터 위어는 쉽사리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