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성장동화 <피터팬> LA 시사기
2003-12-22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정서적 깊이가 살아 있는 100% 라이브 액션

12월6일, LA 컬버시티의 소니 스튜디오에서 열린 <피터팬> 해외 기자시사회를 가는 동안만 해도 역사상 처음으로 100% 라이브 액션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최신 버전 <피터팬> 스토리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뜻밖에도 <뮤리웰의 웨딩>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만든 P. J. 호건이 감독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을 뿐.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발칙한 꼬마 피터팬의 이야기야 이미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친숙할 뿐더러 ‘피터팬 신드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네 일상(!)에까지 파고든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시사회가 예정된 스튜디오 내의 ‘킴 노박’ 극장을 찾아 넓디 넓은 스튜디오 세트를 끝없이 걷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크린에서 ‘피터팬’의 얼굴을 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로빈 윌리엄스의 얼굴, 스티븐 스필버그의 <후크>의 기억을 가까스로 제치고 나니 그나마 기억 저편에 초록색 옷에 뾰족 모자와 구두를 신은 디즈니 애니메이션판 피터팬이 있다. 동행한 친구에게 물었더니, 한참을 고민하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던 ‘윤복희’가 기억난단다. 그러고 보니 70년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서 와이어에 매달려 노래를 부르던 윤복희판 피터팬에 대한 추억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최초의 100% 라이브 액션 장편’이라는 홍보문구의 참뜻은 시사회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밝혀졌다.

성장한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희망과 두려움

콜럼비아픽처스, 유니버설픽처스, 레볼루션 스튜디오가 공동제작한 <피터팬>은 지난 100년간 수없이 연극과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진 피터팬 스토리를 ‘아동용 모험담’이 아니라, J. M. 배리의 원작에 충실한 영화로 만들어보겠다는 프로듀서 루시 피셔의 야심찬 기획의 결과물이다. <피터팬>이 원래 뮤지컬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토머스 하디, H. G. 웰스, 예이츠 등과 동시대인이었던 극작가 J. M. 배리가 1904년 런던 요크 극장에서 초연한 이래, <피터팬>은 지금까지도 전세계에서 공연되는 클래식 중 하나가 되었단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터팬>은 희곡을 바탕으로 1911년 배리가 출판한 소설 <피터와 웬디>이다.

<콘택트>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등을 제작하기도 했던 피셔는 원작 <피터와 웬디>의 제목처럼 피터의 모험담일 뿐 아니라 ‘웬디의 이야기’이기도 한 스토리에 반해 판권을 구입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그녀의 오랜 꿈을 이루었다. 피셔의 남편이자 공동제작자인 더글러스 윅은 <글래디에이터>와 <스튜어드 리틀>의 경험을 살펴 피셔의 꿈을 스펙터클로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 ILM이 전담한 특수효과로 만들어진 네버랜드는 딱 어린이의 시각에서 본 모험담을 담기에 알맞을 만큼 환상적이다. 특히 웬디 일행이 피터팬을 따라 런던 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에서 같이 동참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게 할리우드의 테크놀로지는 대리만족의 기쁨을 제공한다. 오프닝신의 런던 지붕 풍경이 어째 낯익다 했더니 촬영감독이 <물랑루즈>의 더글러스 맥알핀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뭐니뭐니해도 네버랜드. 호주의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세트 10채에 지어졌다는 네버랜드 세트는 솜사탕 같은 구름과 으스스한 해적선, 집채만한 악어 등 그림책에서 오려낸 것처럼 낯익은 주인공으로 가득하다.

할리우드의 특수효과에 힘입어 ‘모험담’이 실감나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면, 원작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한 제작진의 부담을 해결한 것은 설득력 있는 배우들의 캐스팅과 감독 P. J. 호건이다. 웬디의 아버지와 후크의 1인2역을 맡은 제이슨 이삭, 웬디 어머니 역에 <식스 센스>의 올리미아 윌리엄스, 원작에는 없지만 감독 호건이 창조해낸 캐릭터인 밀리슨 고모 역에 린 레드그레이브 등 성격파 배우들이 ‘어른’의 세계를 책임진다.

한편, 1924년 무성영화 버전을 비롯해 수많은 연극무대에서 주로 여성이 맡아온(윤복희가 예외가 아니었다!) 피터팬 역은 역사상 처음으로 그 또래의 배우, 12살의 제레미 섬터에게 돌아갔다. TV드라마와 영화 <프레일티> 등에서 주목받은 이 아역배우의 용감무쌍한 피터는 앞으로 로빈 윌리엄스를 제치고, 우리 기억 속에 피터팬의 이미지로 남을 만큼 매력적이다. 섬터와 호흡을 맞춘 것은 미국, 영국, 호주에 걸친 오디션에서 수백대의 경쟁을 뚫고 뽑힌 12살의 영국 소녀, 레이첼 허드우드. <피터팬> 이전에 연기 경험이 전무한 이 고전적인 용모의 소녀는 오히려 연기 경험이 없는 탓에 리얼한 웬디 역을 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캐스팅의 마지막 히든 카드는 아마도 팅커벨 역의 뤼디빈 사니에르일 것이다.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 풀>로 주목을 받은 이 프랑스 미녀가 대사 한마디 없이 무성영화식으로 해내는 코미디 연기를 하리라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스필버그가 제작했으면 분명히 달랐을 <피터팬>이 ‘어린이와 한때 어린이였던 어른들을 위한 성장동화’로 태어난 것은 무엇보다 감독 P. J. 호건의 공으로 보인다. <피터팬>을 ‘액션어드벤처’가 아니라 성장한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희망과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성장소설로 그리는 데 호건 이외의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는 프로듀서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원작을 외고 다닐 정도로 분석했다는 호건은 무엇보다 웬디, 피터, 후크를 평면적인 만화주인공이 아니라 정서적 깊이가 살아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개구쟁이 같은 두눈을 반짝이며 인터뷰장에서 만난 호건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피터팬’이라는 프로듀서의 귀띔과 달리 이미 ‘어른이 된 피터팬’이었다.

어린이의 웃음과 어른들의 슬픔

호건에 따르면, <피터팬>은 웬디의 모험담이기도 하다. 내일부터는 어른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명령받은 웬디가 ‘창문을 박차고 날아가는’ 순간부터 모험담이 시작되는 것이다. 피터와 후크를 만나고, 이들을 떠나 다시 아버지가 지배하는 집으로, 성장의 시간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웬디의 여정에는 뼈아픈 현실감이 있다.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 웬디의 비애라면, 피터팬의 비애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다. 아무리 웬디를 사랑할지언정 학교에 가고 결혼을 하고 회사에 가야 하는 어른의 세계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아서 혼자서 네버랜드에 남기로 결심한 피터팬의 쓸쓸한 마지막 모습은 우리 시대 피터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터팬>의 가장 신선한 매력은 단지 비열한 악당이 아니라 처음으로 실감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게다가 매력적이기까지 한 ‘후크’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까지 무지막지한 악당으로 등장해 이유없이 피터와 그 무리들을 괴롭히던 후크를 떠올린다면, 새삼스레 후크가 왜 피터팬을 미워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후크와 웬디 아버지 역의 제이슨 이삭은 인터뷰에서 “후크야말로 어른이 된다는 것의 무서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명쾌하게 답을 내린다. 그러므로 후크가 웬디 아버지의 다른 버전이라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호건의 통찰력은 이 무서운 인물들이 사실은 ‘두려움이 많은 인물’이라고 그려내는 데서 빛을 발한다. 상사와 이웃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소심한 소시민 웬디의 아버지만큼, 거칠것 없어 보이는 후크도 “계획대로라면, 7대양을 지배하고 존경을 받는 해적 선장이 되었어야 하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가 아닐까 고민하는 것이다. 이미 반쯤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버린 어른 후크가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꼬마 피터팬을 미워하는, 아니 실은 부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인터뷰장에서 만난 해외 기자들의 공통된 반응은 영화를 본 뒤 놀랍게도 ‘슬펐다’는 것인데 (인도에서 온 기자는 영화가 끝나고 눈물을 흘렸노라 고백하기도 했다), 특별히 비극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피터팬>이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자들의 심정이 반영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시사회 뒤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극장을 나서던 어린이 관객은 아마도 이 ‘잃어버린 순간’의 비애를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피터팬이 아직도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단지 ’네버랜드’의 환상적인 이미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에 개봉하는 <피터팬>은 2004년 1월16일, 어린이들과 한때 어린이였던 한국의 관객을 찾아간다.

감독 P.J 호건 인터뷰
"후크는 웬디 아버지와 ‘다른 버전’의 성인 남성"

영화를 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요소는 무엇인가.

원작에 충실하자는 것이었다. 베리의 원작은 어드벤처, 드라마, 코미디가 결합된 수작이었다. 그동안 다양한 버전의 <피터팬>이 심리묘사가 복잡하고 다채로운 원작에서 멀어져간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감독 제의를 받았을 때 상당히 흥분했었다.

왜 피터팬 이야기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의 관심을 끈다고 생각하나.

피터팬은 기본적으로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인기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원작자인 베리는 “모든 어린이는 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당연히 어린 시절에 우리가 가졌던 것들을 상실하는 것이 슬픈 일이란 것을 의미한다.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우리는 무언가를 잃을 뿐 아니라 어른으로서 새로운 짐을 지게 된다. 하지만 피터팬은 성장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형태의 대가를 치른다. 나는 원작자가 이러한 점들을 인식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전작들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닌데 이 영화에서 피터와 웬디의 관계는 무엇인가.

첫사랑이 아닐까. 나는 성장의 문턱에 있는 웬디를 그리고 싶었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피터와의 사랑은 웬디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웬디와 후크는? 둘 사이엔 분명히 미묘한 긴장감이 있다.

그렇다. 성장기의 웬디는 모험을 원한다. <보물섬>을 생각해보라. 주인공인 소년 짐은 해적 선장인 실버에게 묘하게 끌린다. 같은 맥락에서 웬디는 후크에게 처음 만날 때부터 매혹된다. 웬디는 후크에게서 (아마도 성장한 이후의) 자신의 모습의 일부를 본다. 그것은 후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선원들보다 웬디에게 가장 큰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 후크는 웬디 아버지의 ‘다른 버전’으로서의 성인 남성이다.

영화를 보면서 놀란 것 중 하나는 후크의 캐릭터에 동정이 간다는 사실이다.

후크의 캐릭터는 내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부분 중 하나이다. 원작에서 복잡한 내면을 지닌 후크의 캐릭터를 재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제작된 <피터팬>에서 후크는 그저 코믹한 인물로만 그려져왔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문제가 있는 인물이지만 한때는 뛰어난 선장, 최고의 해적 선장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의 후크는 갇혀 있는 인물이다. 더이상의 자유가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 나비가 바로 피터팬이다.

호주에서 촬영을 하자고 적극 제안했다고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었다. 호주에서 일하려고 했던 이유는 호주의 스탭들과 일하고 싶어서였다. 이 영화는 내가 참여한 작품 중 가장 큰 프로젝트였고, 시간을 많이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 때문에 헌신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스탭들이 필요했다. 물론 할리우드에도 매우 뛰어난 인적 자원이 있지만, 헌신적인 스탭을 찾기는 좀 어렵다. 또한 학교에 다니며 짬짬이 촬영을 하고 쉽게 지치는 아역배우들과 오랫동안 작업하기에 ‘유쾌한’ 호주의 스탭들이 낫다고 생각했다. (웃음)

특수효과팀과 일한 경험이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데 어떤 차이를 끼쳤나.

이번 작품은 내가 특수효과팀과 일한 최초의 작품이다. 새로 배울 것이 많았다. 앞으로 내가 다시 쓸 일이 없을 간단한 용어들부터 시작해서…. (웃음) 그러나 다른 내 영화와 마찬가지로 나에겐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 이 영화의 경우 그저 특수효과가 기술적으로 꼭 필요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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