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영화적 상상력, <루니툰 : 백 인 액션>
2003-12-23
글 : 김용언
루니툰 캐릭터들과 조 단테의 요란한 랑데부, B급영화의 감수성이 하이 컬처와 메이저 스튜디오의 한복판에서 살아숨쉰다!

얄미운 생쥐 제리보다는 영 운이 따라주지 않는 고양이 톰쪽에, 혹은 카나리아 트위티보다는 고양이 실베스터쪽에, 예의바르고 사랑스러운 미키 마우스보다는 도날드 덕이나 구피쪽에 감정이입을 했던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벅스 버니의 팬 층은 고르게 분포되어 있죠. 하지만 검은 오리 대피의 팬 층은 오로지 루저들밖에 없다구요!”라는 워너 간부 케이트(제나 엘프먼)의 혹독한 발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대피의 심정을. 언제나 버니 대신 사냥꾼 엘모어의 총에 맞아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2인자, 자신감을 되찾고 싶은 검은 오리의 절규를. 그리고 대피가 결국은 인류를 원숭이로 만들어버리려는 악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될 것이다. 루저들이여, 단결하라!

결국 인기 만점의 벅스 버니만을 남겨두겠다는 워너쪽 결정에 따라 쫓겨난 대피는 번번이 스턴트맨 오디션에 낙방하는 디제이(브랜든 프레이저)와 함께, 디제이의 아빠이자 스파이라는 정체를 감추고 유명한 스파이 전문 배우로 가장하고 있는 데미안(티모시 달튼)을 구출하고 동시에 다이아몬드 ‘블루 멍키’를 악당의 손에서 지키기 위한 여정을 얼떨결에 떠난다. 대피를 막상 해고하고 난 뒤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마당에, 다시 대피를 모셔오기 위해 케이트와 버니도 그들의 뒤를 쫓는다. 한편 블루 멍키를 통해 전 인류를 원숭이로 만들어 상품을 값싸게 생산한 다음, 다시 원숭이들을 인간으로 바꿔놓아 그 상품만을 사게끔 하겠다는 악덕 자본가의 마인드를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는 애크미 회사 회장(스티브 마틴) 역시 수많은 카툰 악당들을 풀어놓아 그들의 모험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벅스 바니를 질투하던 쫓겨난 대피 덕은 디제이와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향하고, 다시 대피 덕을 불러오라는 명령을 받은 케이트는 벅스 바니와 함게 뒤를 쫓는다.

<스페이스 잼> 이후 7년 만에 한국 극장가를 찾은 실사애니메이션 무비 <루니툰: 백 인 액션>은 여러 의미에서 엔터테인먼트 종합 상품이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작품들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실사배우들보다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훨씬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영화적’인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발휘할 수 있는 인물들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30, 40년대 코미디영화들을 보고 자라난 애니메이터들(특히 대피의 아버지인 애니메이터 척 존스는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세련된 매너의 벅스 바니의 모델은 그라우초 막스라는 설이 있다)은 구부러지고 납작해지고 분쇄되다가 다시 결합되고 줄어들고 늘어나는 인체의 가능성을 선과 면의 분할로 가능케 한 당사자가 아닌가!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쫓아 라스베이거스부터 파리, 아프리카, 우주로까지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는 주인공들에게 어떤 악독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불멸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보다 더 적절한 선택이 어디 있겠냔 말이다. 버니와 대피를 비롯, 테즈와 코요테, 엘모어와 요새미티 샘 등 루니툰 캐릭터들은 자신들에 맞춰 연기하느라 진을 빼는 인간 배우들을 비웃듯, 종횡무진 스크린 속 스크린을 넘나들며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영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확장시킨다(예를 들어 대피가 영화 세트장 배경그림 속으로 도망칠 때 브랜든 프레이저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

또한 조 단테가 이 카툰 캐릭터들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인물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도 <루니툰: 백 인 액션>이 안겨주는 즐거움은 배가된다. <스몰 솔져> 이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조 단테는 다시금 요란한 슬랩스틱 유머와 사랑스럽게만 ‘보여지는’ 외피 속에 자신만의 인장을 찍어넣었다. 스튜디오에 고용되었으면서도 제작자들이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어내는 대신 자신의 세계관과 스타일을 꾸준히 견지해나간 감독들에게 ‘작가’라는 호칭을 붙였던 누벨바그 세대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조 단테 역시 충분히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렘린> 시리즈라든가 <하울링> <마티니> <이너 스페이스> <스몰 솔져> 등의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삐딱한 감수성에 열광했던 소수의 팬들을 제외하자면, 조 단테는 스튜디오 중심 체제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루니툰: 백 인 액션>에서도 월마트 PPL 광고라든가 전세계를 자본주의의 가장 극악한 형태로 몰고가고자 하는 애크미 회사의 음모, 로즈웰 외계인을 비롯한 미국사회에 만연한 음모이론 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이 영화 전체를 풍자와 조롱의 무정부적 카니발 상태의 절정으로 이끌어가는 한편 50, 60년대 B급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적인 애정과 경의의 제스처를 프레임마다 쏟아붓다시피 한다. 조 단테의 심술궂은 미소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이라면 기꺼이 <루니툰: 백 인 액션>에 환호할 수 있을 것이다.

::<루니툰: 백 인 액션>의 우아한 인용들

<싸이코>에서 <모나리자>까지

<루니툰: 백 인 액션>은 인용의 포화상태에 이른 영화다. 히치콕의 <싸이코>(샤워 중이던 벅스 버니가 케이트를 보고 놀란다), 시리즈(‘제임스 본드’ 티모시 달튼이 스파이 전문 배우 데미안 드레이크로 등장한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TV 화면으로 전달되는 일급 정보들. “잠시 뒤 이 테이프는 자동 소각된다”), <스타워즈> 시리즈(버니의 당근이 포스 검으로 변신!), <배트맨> 시리즈(디제이와 대피는 <배트맨> 촬영현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며, 데미안의 스파이 카는 배트맨 카 모델을 그대로 모셔왔다), <오스틴 파워> 시리즈(애크미 회장은 명백하게 닥터 에빌의 형제이다), <미이라> 시리즈(블루 멍키가 묻혀 있는 아프리카 시퀀스), <니모를 찾아서>(물바다가 된 자동차 속에 니모가 헤엄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연한 <비바 라스베이거스>(라스베이거스로 떠나는 길 위에서 버니가 유쾌하게 엘비스의 모창을 시도한다) 등등의 영화목록들이 수없이 참조되며, 동시에 고급 예술과 팝 컬처가 우아하게 조우하는 역사적인 장이 되기도 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달리의 <기억의 지속>, 뭉크의 <절규>,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로트렉의 물랭루주 회화에 대한 유쾌한 오마주는 <루니툰: 백 인 액션>에서 단연 백미로 꼽을 수 있는 시퀀스다. 또한 에펠탑 아래에는 제리 루이스의 포스터가 걸려 있으며, <배트맨>을 찍던 감독으로 로저 코먼이 출연하고, 워너 스튜디오 경비원과 ‘52구역’의 박사 중 한명으로 등장하는 딕 밀러와 케빈 매카시는 B급영화를 보고 성장했던 조 단테가 열광했던 배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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